이주천
이주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동부와 서부에서 침공했다. 전면전이 발생한 지 7주를 넘기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항복을 거부하며 국민들에게 항전을 호소하였다. 주목할 점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국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우리도 이번 침략을 잘 극복하면 한국처럼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올 만큼, 6.25전쟁은 우크라이나전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첫째,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통렬한 기습을 받았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 어른들의 대화에는 ‘설마’가 가장 유행하던 풍자어였다. "설마 김일성이 남침을 하랴?" "설마 우리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반민족적 행위를 하랴?" 우리는 김일성의 민족애와 그의 선의(善意)를 철석같이 믿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인들 중 누구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무방비상태였다. 두 전쟁은 적의 선의에 기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둘째, 내전적 상황이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국의 경우, 미 군정시절부터 건국초기까지 남로당계열과 좌익공산계열은 수시로 총파업, 폭동과 반란을 획책했다. 5·10총선반대를 통해 건국을 방해했으며 막 출범한 이승만정부를 뒤흔들었다. 대구10.1폭동, 제주4.3폭동, 여순14연대반란사건 등이 그것이다, 우크라이나는 91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이후, 친서방의 서부와 친러시아의 동부가 오랫동안 반목·대립해왔다. 대선 때마다 극심하게 충돌했고 내란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자초했다.

셋째, 동맹의 부재 속에 속수무책 침공을 당했다. 한국에서는 1949년 6월 미국의 한반도 불개입정책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가 강행됐다. 우크라이나는 여러 차례 나토의 가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넷째, 양 전쟁 모두 국제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로 인해 개전 초기에 고전했으나 국제적 지원에 힘입어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전은 미국의 직접적 군사개입, 유엔군 결성과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세의 역전을 노리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과 지병원들이 모인 국제여단이 참전하면서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있다.

다섯째, 지정학적 조건도 유사하다. 우크라이나는 흑해를 끼고 있고 폴란드 등 인접국가와의 국경선을 통해 지원을 받고 있으며, 한국은 현해탄과 태평양을 통해 미국의 물자가 들어왔다. 도움을 준 우방국도 유사하다. 우크라이나의 피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폴란드가 후방 병참기지가 되었고, 한국전의 경우 일본이 후방 병참기지가 되었다.

여섯째, 국민들의 항전의지다. 초기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등 우방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전을 펼쳤다. 병사들의 항전의지도 미군 수뇌부를 감동시켰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오산전투에서 패퇴하는 한국군 병사가 "우리에게 무기를 주세요"라고 절규한 것에 감동을 받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우크라이나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항전의지에 감동 받은 서방진영이 지원을 약속하였다.

일곱째, 전투와 협상을 동시에 병행하고 있다. 한국전은 1951년 봄 서울 재수복 이후, 38선을 두고 전선의 교착상태가 이루어졌다.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중공군간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국경선과 포로송환문제가 난항을 겪으면서 무려 2년을 끌었다. 우크라이나전쟁도 5차 협상이 진행중이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양국 전쟁을 비교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서구의 전쟁 관점을 수렴하면서도 한국의 독자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전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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