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군사전략가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이 일어난 원인 가운데 ‘비핵화’를 우선 언급한다. 우크라이나가 1991년에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 독립했을 때, 세계 3번째 핵무기를 보유국이었다. 그러나 핵무기 확산을 두려워한 러시아와 미국 등은 우크라이나에게 핵무기 포기를 설득했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회의에서 미국·영국·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벨라루스 외교장관들이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1994.12.5)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국·영국·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 것이다. 1996년 마지막 핵탄두가 우크라이나를 떠났고, 2001년 핵무기 시설 해체도 완료됐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에게 돌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2014년 돈바스 내전 사태로 인해 크림반도와 동부 일부를 상실하면서 올해 3월 24일, 러시아 침공의 전초전이 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술핵 사용 가능성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약소국가의 비핵화 비극은 비단 우크라이나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핵보유국가가 국제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시대에 핵을 보유하지 않는다면 안보위기가 온다고 인식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핵무장에 무관심했고,중·고시절에 사회과목에서 배웠던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으며, 미 정보기관은 청와대와 연구소의 핵개발을 감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한 뒤, 조지아 주지사 카터가 도덕정치를 내세우면서 대선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다. 카터 행정부는 한국의 자주국방 행보가 대미의존도를 줄이고 궁극적으로 미국 궤도에서 이탈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한국의 핵무장으로 인한 군비확장이 북한은 물론 동북아에 군사적 불균형과 긴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카터 행정부는 한국의 무기개발(핵 포함)과 미국산 무기를 해외에 수출하는데 통제를 강화했다.

박 대통령의 핵 개발에 대한 집념은 72년 초 닉슨 행정부 시절로 거슬러간다. 당시 오원철 방위산업 주무 상공부 차관보를 경제제2수석비서관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했다. 동기는 세 가지였다. ① 북한 남침에 대한 대북 억제력 확보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핵으로 지킨다. ②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확대하여 한국의 위상을 높인다, ③ 주한미군 주둔을 위한 대미협상 지렛대로 사용한다.

박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지 롤런드 에반스 ·에반스 노박과 가진 인터뷰(75.6.12)는 폭탄선언이었다.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할 경우 한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소련·중공 및 일본의 한반도 평화보장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보았듯이(베트남 공산화)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비현실적"이라고 ‘4대국 보장론’의 무용성을 거론했다. 파리협정(1973)에서 강대국들의 안전보장이 북베트남의 전면 침공(1975)시 베트남을 전혀 지켜주지 못한 점을 목격한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크라이나 비극을 예견한 듯하다.

박 대통령은 미국이 감시하는 상태에서 독자적 핵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는 대미협상을 극대화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공약,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독려했으며, 서해5도 방위문제와 한국 공군의 증강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핵개발은 포기했지만, 원자력발전소를 통해 평상시 에너지원을 확대하고 유사시에 핵무기 개발로 전용할 수 있도록 핵정책을 전환시킨 것이다. 그러나 10.26사태 이후 한국의 핵개발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우방 한국의 핵개발을 막아냈지만 적성국 북한의 핵개발은 막지 못하면서 한반도에서 비대칭전력의 열세를 가져왔다. 이것을 어떻게 납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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