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⑩ 대중노선이 가져온 6.10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호헌 철폐 국민대회'로 6월 항쟁 막 올라
20일간 투쟁에 국민 500만명 참여해...'직선제 개헌' 6·29 선언 쟁취
학생운동권 대선 후보 문제로 분열...야권 단일화 못해 정권교체 실패

1987년 6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교문진출 시위에 참가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 학교 이한열의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이 걸개그림이 걸린 도서관 앞 백양로를 지나고 있다.
1987년 6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교문진출 시위에 참가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 학교 이한열의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이 걸개그림이 걸린 도서관 앞 백양로를 지나고 있다.

전 세계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구속자를 낸 애학투련 건설과 건국대 사태는 학생운동 내부의 근본적 반성을 불러왔다. 즉, 이론적으로는 대중노선으로 전환했지만, 실제적인 행동에서는 여전히 과격한 투쟁구호와 방식에 머물러 있는 관념적인 급진성에 대한 반성이었다.

반성은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관념적 급진성과 분파주의 온상인 ‘써클 해체’였다. 특히 1970년대부터 서울대와 고대에서 학생운동을 이끌어온 ‘언더 써클’을 해체하고, 과 학생회-단과대 학생회-총학생회로 이어지는 대중조직 중심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70년대부터 학생운동을 이끌어온 ‘언더 써클’의 해체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분파주의’에 대한 자아비판을 진행하는 등 공산당식 숙청작업이 진행되다 보니, 비판으로 상처를 받고 휴학을 하거나 군대로 도피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리고 시위와 행사를 위주로 하는 과 학생회-단과대 학생회-총학생회로 이어지는 조직체계가 중시되다 보니, 학생운동 활동가를 육성하는 ‘재생산체계’가 무너졌다. 그로 인해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철학사상과 이론적 능력이 급속히 저하되었다. 결국 ‘통혁당의 소리 방송’에서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전환된 북한 단파 라디오에 대한 의존이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 관념적인 과격 투쟁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정권의 탄압을 자초한다는 반성이었다. 모든 투쟁은 대중의식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헌 투쟁을 할 때, 신민당 등 보수 야당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노선은 학생들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대중노선으로 NL계열의 학생운동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NL계열 대중노선으로 전환, CA계열 선도투쟁론 고집

반면 민민투의 본산이었던 연세대의 이탈로 급격히 세가 약화 된 민민투 진영은 성균관대를 중심으로 조직재건에 나섰다. 그들은 ‘헌법제정 민중의회 소집’ 주장을 ‘제헌의회 소집’ 주장으로 바꾸고 신민당 등 야당에 대한 비판과 선도적 투쟁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선도적 투쟁방식도 계속 유지했다.

이들은 1986년 11월 13일 노동자들과 함께 신길동에서 "군사파쇼 타도하고 제헌의회 소집하자", "민주혁명 가로막는 미일 제국주의 축출하고 제헌의회 소집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민민투 지도부는 85년 말 소위 ‘깃발사건’으로 와해 된 ‘민추위’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는 학생운동의 대학 간 연락을 담당해왔던 지하 연락망으로 서울대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이었다. 산하에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 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를 두고 84년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등 구로동맹파업 동조 시위 등 민중지원 투쟁과 85년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과 5월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을 배후 조종하였다.

이들은 84년에 민추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 올바른 운동방법,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성향의 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안당국의 검거대상이 되었다.

공안당국은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이후 ‘깃발’ 전담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설치하고, 추적했다. 1985년 10월 29일 검찰에서 민추위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로 규정한 뒤, 관련자 26명은 구속, 3명은 불구속 입건하고, 17명을 지명수배하였다. 이 사건의 배후지도자로 민청년 의장이었던 김근태가 구속되어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다.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 추모제가 열린 고려대에 모인 서울 동부지구 학생들이 추모제를 마친 뒤 교문을 나서고 있다.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 추모제가 열린 고려대에 모인 서울 동부지구 학생들이 추모제를 마친 뒤 교문을 나서고 있다.

민민투 계열에서 개헌 투쟁을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명시하고, 민추위, 서노련 관련자들을 모아 전위당 조직건설에 나서면서 민추위 관련 수배자에 대한 색출작업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최민 등이 주도한 제헌의회 그룹의 중앙조직이 1986년 11월 안기부에 의해 검거되면서 경쟁 관계인 치안본부의 ‘깃발’ 전담반에서는 수배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수배자 검거에 혈안이 된 치안본부에서 벌어진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그 과정에서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박종운을 검거하기 위해 서클 후배인 박종철을 검거하고 자백을 받기 위해 물고문을 가했다.

경찰은 "수사를 하면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죽었다"고 발표하며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다. 하지만, 고문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국민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2월 7일의 박종철군 추모대회와 3월 3일의 ‘고문추방 민주화 대행진’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여 가두에서 "직선제개헌"과 "독재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현행 헌법에 따라 차기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각계각층에서 ‘4.13 호헌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이 줄을 이었고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가열되었지만, ‘직선제 개헌’과 ‘제헌의회 소집’으로 나뉜 논란으로 개헌은 불가능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주력이 신민당과 연대 기조를 갖춘 것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과 학생회의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각 대학 간 연대 조직을 만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5월 8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가 결성되었다. 이어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부울총협)’ 등 지역별 학생협의체가 건설되었다.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투쟁이 확산되는 가운데,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은폐조작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로 전두환 정권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5월 27일 통일민주당(이민우 파동으로 신민당이 통일민주당으로 개편)과 민통련 등 모든 민주세력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다.

‘국본’이 중심이 되어 전 국민적 항쟁을 준비해갔다. ‘국본’은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6월 10일을 기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에 학생들은 6.9, 6.10 총궐기위원회를 구성하여, 호응하였다. 6월 9일 총궐기 대회를 진행하던 연세대 시위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벌어진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

1987년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6월항쟁의 막이 올랐다. 6.10 국민대회에 이어 5박 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 그리고 이한열 사망에 따라 18일 최루탄추방 결의대회, 26일의 국민 평화 대행진 등이 이어졌다. 20일간의 항쟁이 벌어지는 동안 500만이나 되는 국민이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지역별 학생협의체를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이끌었다. 계엄령 등 폭력적 진압을 고민하던 전두환 정권은 강경 진압을 포기하고, 야당의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6.29 선언은 야권이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분열되어 "정권연장이 가능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6.29선언은 80년대 수많은 희생을 딛고 온 학생 운동사를 생각할 때, 값진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8월 19일 충남대에서 전국 95개 대학 학생들의 대표조직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결성되었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 발표를 하고 있다.

6.29선언으로 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6.29선언은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김영삼, 김대중의 양 김씨는 ‘국본’에서 이탈하여 대통령 선거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민주화운동 진영 내에서 선거혁명론이 대두되었다. 학생운동에서도 ‘선거혁명론’이 대두되었다.

한편, 6월 민주항쟁으로 영향으로 억압받던 노동현장에서 ‘어용노조 해체’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결성을 시작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 창원, 구미를 거쳐 북상해서 수도권 일대 공장지대를 휩쓸었다. 이어 언론과 금융 등 사무직에서 노조결성이 잇달았다.

12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학생운동권은 ‘후보 문제’를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의 주류인 NL 진영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양김 후보단일화’ 입장으로 나뉘었다. 제헌의회(CA) 소집 그룹 등 PD 진영은 중심으로 한 진영은 백기완 독자 후보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견인 입장과 완주 입장으로 나뉘었다.

백기완 후보는 후보들 간의 ‘민주연합전선’ 결성이 실패하자 12월 14일 후보를 사퇴하였다.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던 NL의 일부도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가 출마하면서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결국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씨가 출마하여 표가 분산됨으로써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한 대선패배와 좌절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가 승리하면서 6월 민주항쟁의 성과는 물거품이 되었다. 학생운동은 4.19 학생혁명 때와 유사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의 분열은 적대감을 노출하며,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엄혹한 시기에 단결되었다가, 승리의 시기가 열리며 분열되는 역사를 반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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