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仙花

 

一點冬心朶朶圓
(한 점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
品於幽澹冷雋邊
(그윽하고 담담한 기풍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
梅高猶未離庭체
(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靑水眞看解脫仙
(맑은 물가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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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추사(秋史)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갔다가 겨울에 피어난 수선화에 처음으로 매료되었다. 중년의 추사는 수선화를 잊지 못하고 당시 평안감사였던 부친이 가지고 있던 수선화를 자신에게 달라고 졸랐다. 김노경이 가지고 있던 수선화는 중국 사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추사는 수선화를 자신만 감상하는 걸 사치라 여긴 나머지 남양주에 살던 다산(茶山) 정약용에게 선물했다. 다산은 그 사실을 이렇게 썼다. 秋晩金友喜香閣寄水仙花一本其盆高麗古器也(늦가을 김정희 벗이 평양에서 수선화 한 뿌리를 부쳐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 때의 오래된 그릇이었다). 후일 다산은 수선화를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구절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 말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어 놀랐다고 하네.’

1840년 추사 김정희는 1830년에 일어났던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한 뒤 귀양길에 올랐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되었다. 제주에서 추사는 어디서나 흔하게 피어난 수선화를 목도했다. 당시에 수선화는 육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식물이었다. 추사는 평생지기 권돈인(權敦仁)에게 편지를 써서 수선화를 본 감동을 이렇게 전하였다.

"이곳의 마을마다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산과 들, 밭둑 사이에 흰 구름이 깔린 듯, 흰 눈이 쌓인 듯 드넓게 퍼져 있어 천하에 큰 구경거리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이걸 귀히 여기지 않아 보리밭에 자라난 이 꽃을 마소가 뜯어먹게 내버려두고 짓밟아버리는가 하면 사람들이 호미로 파내어버린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수선화를 말마농이라 불렀는데 이는 수선화 구근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마늘이라는 뜻이었다.

추사는 홀대받는 제주의 수선화가 억울하게 귀양살이 하는 자신과 처지와 같다고 여겼다. 그런 제주의 수선화는 추사를 만나 비로소 ‘맑은 물가에서 해탈한 신선’의 꽃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어쨌거나 수선화는 추사의 고독한 유배생활에 큰 위로가 되었을 터이다.

첫 구에 ‘一點冬心朶朶圓’(한 점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는 겨울에 핀 수선화 모습을 묘사하고, ‘梅高猶未離庭체’(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라는 대목에서는 위리안치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자신의 처지를 매화에 투영하고, 결구에 靑水眞看解脫仙이라고 하여, 비록 자신은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 매화 같은 신세지만 그 대신 맑은 물가에서 해탈한 신선의 꽃을 보아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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