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경북 영주

남동쪽 외진 무섬마을 사대부 가옥 30여채...옛 삶이 이어지는 곳
시간을 달리다 지치면 5km 죽령옛길서 고요를 만나도 반가워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오지 마을을 바깥세상과 이어주던 유일한 길이다. 얕은 강물 위로 위태롭게 놓인 이 다리를 마을 사람들은 때로는 울며, 때로는 웃으며 건넜다.

1999년 여행기자가 되어 동가식서가숙하며 밥을 버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영주에 열서너 번은 취재를 갔던 것 같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소백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고, 부석사 오르는 새벽의 은행나무 숲길을 걸었다. 낙우송 노랗게 물든 고치령을 낡은 SUV를 타고 비틀비틀 넘기도 했다. 사과가 익을 무렵 죽령옛길을 또 얼마나 좋았던지. 땀 흘리고 걷고 난 후 풍기 온천에 몸을 담근 채 인생의 여유를 만끽하던 날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찾았던 계절은 대부분 가을이었던 것 같다.

가을 정취 가득한 전통마을

오늘은 무섬마을에 와 있다. 영주 남동쪽 외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내성천이 산과 들을 휘감아 돌며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지고,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그 사이로 태백산과 이어지는 내성천이 흐른다. 무섬마을은 영주시의 경계로 안동, 봉화와 맞닿은 곳이다.

마을은 340여 년 전, 반남 박씨가 들어와 터를 잡으면서 만들어졌는데 이후 선성 김씨가 들어왔고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는 고색창연한 전통 한옥 30여 채가 남아있는데 대부분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이다. 이 중 9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고종 때 병조참판을 지냈던 박재연 가옥 등이 줄지어 서 있다. 국내에 전통가옥은 많지만 여기처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민들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무섬마을은 전국 단일마을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한데, 5명의 애국지사가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

무섬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는 매화꽃이 가지에 매달린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형국을 한 길지 중 길지다. 조선시대의 난리와 한국전쟁, 천재지변 등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잃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내성천 맞은편에 서서 무섬마을을 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물섬마을’이라고도 한다.

근대문화역사거리.
근대문화역사거리.

무섬마을에는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1983년 시멘트로 만든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350년이 넘도록 하천 바깥과 마을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다. 다리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사라졌다가 2005년 복원됐다. 다리의 폭은 약 3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ㅠ’ 모양으로 약 60센티미터 높이의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상판을 얹어 만들었다. 물이 얕은 곳을 따라 휘어져 있는데, 길이는 150미터 정도 된다. 외지인이 건널라치면 꼭 한 번씩 빠지고 만다. 하지만 물의 깊이는 고작 허리 높이니 그다지 걱정할 건 없다.

다리의 폭이 워낙 좁다 보니 다리를 건너기 위해선 발 디딜 곳을 내려다보며 잘 살펴야 한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살이 눈에 들어온다. 열두어 발짝 가면 약간 현기증이 나면서 어질어질한다. 다행히 20미터 정도의 간격마다 길을 비켜줄 수 있는 다리가 하나 더 놓여 있다.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반대편 끝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분이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올해 여든셋이라는데, 이곳 무섬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지금 이 다리야 옛날에 비하면 고속도로지. 옛날에는 이런 통나무를 구할 수 있었나. 동네 장정들이 저기 산에서 나무 베어 와서 얼기설기 만들었어. 비가 오면 다리가 떠내려가서 해마다 다시 만들어야 했지."

지금은 다리가 하나뿐이지만, 옛날에는 외나무다리가 세 개 있었다. 상류의 다리는 장 보러 나갈 때, 가운데 다리는 아이들이 학교 갈 때, 하류의 다리는 농사지으러 갈 때 소를 몰고 건넜다.

"꽃가마 타고 이 다리 건너서 이 마을로 시집왔다가, 꽃상여를 타고 이 다리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었지."

처가가 있는 무섬에 잠시 기거하던 시인 조지훈은〈별리〉(別離)라는 시에서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처럼"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자주 고름에 소리없이 맺히는 이슬방울/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

옛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고요

영주에도 근대문화 역사거리가 있다. 영주는 한때 철도 교통의 요충지였다. 중앙선과 영동선이 놓이자 사람들이 몰렸다. 당시에 들어섰던 이발관과 정미소, 교회가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화려한 한때를 증거하고 있다. 영광중학교 주변에 영주역 관사 2곳, 근대한옥, 이발관, 정미소, 교회가 각 1곳이 남아있다. 1940년대 건립된 풍국정미소, 옆에 자리한 영광이발관은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58년 세워진 영주제일교회 고딕양식을 자랑한다. 아이들과 손잡고 산책 삼아 걸어며 구경해도 좋을 듯싶다.

걷기 좋은 죽령옛길.
걷기 좋은 죽령옛길.

시간이 된다면 죽령옛길도 걸어보시길. 소백산역을 출발해 죽령 고갯마루까지 약 2.5km. 고개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다시 길을 되짚어 소백산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걸을 때마다 짙은 풀냄새가 콧속으로 훅훅 스민다. 물푸레나무며, 신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고추나무. 그리고 으름덩굴이며 청가시덩굴, 칡덩굴, 노박덩굴이 다 함께 어울려 뿜어내는 숲 냄새는 달짝지근하고 또 시큰하다. 걷다 보면 풀 섶 이슬이 바짓단을 슬며시 적시고, 어디선가 안개가 불현듯 불어오고 밀려와서 어깻죽지를 서늘하게 누르곤 한다.

죽령옛길은 내내 고요하다. 무릎을 치고 가는 흰나비의 날갯짓도 고요하고 전나무 가지를 설핏 흔들고 가는 바람도 고요히 간다. 매발톱꽃과 노루오줌꽃은 고요하게 피고 사과나무밭 사과도 고요하게 열린다.

걷기를 멈추고 숲 어느 자리 가만히 선다. 이 고요.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고요. 여름의 번잡하고 시끄러운 날들을 지나와 비로소 만나는 고요. 복잡하고 힘든 생활에게서 몇 발짝 떨어져서 느껴보는 고요. 이 온전한 고요는 부디 왕복 5킬로미터, 두 시간만이라도 도망가지 말아라.

[여행수첩]

정도너츠.
정도너츠.

전통묵집식당(054-633-9284)은 옛 방식 그대로 묵을 만들어낸다. 풍기역 앞 한결청국장(054-636-3224)은 부석태로 만든 청국장을 낸다. 청국장 샐러드, 잡채, 두부구이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중앙식육식당(054-631-3649)은 소갈비살전문점이다. 풍기읍내 정도너츠(054-636-0067)의 생강도넛이 별미다. 튀겨낸 찹쌀 도넛을 진득하게 섞어 놓은 생강과 깨, 땅콩가루 등에 버무려 내놓는다. 카페 하망주택(054-635-9364)은 80년대 이층 양옥주택을 개조한 카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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