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8·15 광복 후 북한으로 귀국한 김일성에게 가장 절실한 대남 정보는 적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동향 정보와 정적(政敵)으로서 조선공산당 박헌영(朴憲永)의 견제 정보였다. 이때 김일성의 레이더망에 걸린 적임자가 성시백(成始伯)이었다. 성시백은 스파이 활동 경험이 풍부했다. 임정(臨政) 계통 인물들과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주은래(周恩來) 총리에게 친서를 보냈다. ‘조선에는 당신과 같은 유명한 혁명가들이 많지 않다. 조선혁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성시백을 우리에게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서안(西安)에 있던 성시백에겐 차관급 간부를 특사로 보냈다. ‘북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중국공산당 비밀공작원 성시백은 이렇게 북조선노동당 대남공작원이 되었다.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였다. 성시백을 집으로 초대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에게 직접 술과 밥을 내어 오도록 했다. 자신이 애용하던 금장 회중시계와 별도로 마련한 상아 물부리를 선물로 주었다. 성시백의 늦둥이 셋째아들에겐 ‘자립(自立)’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200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90주년에 출판된 김정일 회고록에도 성시백이 등장한다.

"1948년 여름... 어린 내 동생이 정원에서 놀다가 못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남조선혁명가 성시백과 함께 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담화를 나누고 계시었다... 사고의 전말을 알려드리려고 어머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다음에도 수령님께서는 웬일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었다... 수령님께서 밖으로 나오신 것은 그때로부터 퍽 시간이 흘러간 다음이었다. 성시백은 그제야 우리 가정에 어떤 불상사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령님의 손을 부여잡았다... ‘성 선생, 이러지 마십시오. 내 한 가정의 불행이 아무리 큰들 민족이 처한 분열의 위기에 비기겠습니까. 놀라게 해드려 안됐습니다..."

김일성 찬양 일색의 일화들이긴 하지만 김일성과 성시백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케 하는 내용들이다. 당시 김일성 측근에는 성시백만한 프로 스파이가 없었다. 나이도 성시백(1905년생)이 김일성(1912년생)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다. 김일성과 성시백은 기본적으론 상하 관계였지만 절대적 지휘 복종 관계는 아니었다.

김일성의 전폭적 신뢰에 힘입어 성시백은 남한에서 엄청난 정보활동을 전개했다. 1948년 4월, 김구(金九)를 설득해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연석회의를 성사시켰다. 1948년 가을,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던 국회의원 십여 명을 포섭했다.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이 성시백의 공작이었음을 폭로했다. 1949년 5월, 국군 2개 대대 500여 명을 38선을 통해 월북시켰다. 1949년 8월 장개석·이승만의 경남 진해 극비회동과 1950년 2월 이승만·맥아더의 도쿄 비밀회담 내용을 입수했다.

1946년 11월 중국에서 귀환한 후 1950년 5월 남한의 방첩기관에 검거될 때까지, 성시백의 3년 6개월 대남공작원 활동은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남한 방첩기관에서 성시백이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북한에선 ‘대남공작의 원조(元祖)’ ‘대남공작의 대부(代父)’ ‘대남공작의 전설’이 되었다. 성시백은 자기를 알아주는 김일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스파이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스파이에 대한 공작관의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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