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2001년 9·11테러 사건은 사망자만 3000명 이상이고, 부상자는 최대 2만 5000여 명에 이른다. 테러 및 건물 붕괴로 인한 희생자로 세계 최대이며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소방관이 343명, 경찰과 항만경찰이 합쳐서 60명, 이들을 포함한 전체 공무원 인력 희생자가 412명이다. 이 사건은 미국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피해 규모가 그만큼 컸고, 양상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이라크 전쟁,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이 모두 이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의 주범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극렬 테러 그룹 알 카에다 집단이지만, 미국 정부의 대응도 문제가 많았다. 정보기관들이 테러 위협을 계속 경고했지만 미국 정부는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항공 보안도 허점투성이어서 탑승객 신원 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심지어 조종실 문조차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

2001년 8월 FBI가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로 건물에 테러를 가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보고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을 지원해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작전은 2001년 9월 10일까지 부시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인 채 결재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숱한 음모론을 낳았다. 특히 ‘루스 체인지’(Loose Change)라는 다큐멘터리는 여러가지 그럴싸한 근거를 들어 이 사건이 미국 정부의 사전 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상식으로 봤을 때 이 사건에서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대비가 허술했고 온갖 음모론까지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9·11 테러 설계자 등 용의자 5명에 대한 처벌도 지지부진하다. 무슨 이유일까? 미국 정부나 국민들의 준법 의식이 우리나라보다 빈약한 탓일까?

미국에서 9·11 테러의 책임을 물어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보복보다는 사건의 객관적인 진실 파악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적 합의가 탄탄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용의자 재판이 미뤄지는 것은, 이들이 법적으로 ‘적군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모호한 신분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커도 법적으로 따질 것은 따지는 미국의 특성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이태원 참사 이후 책임자 색출과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문제점이 확인되면 당연히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냉정하게 사건의 원인을 따지기보다 속죄양 찾기에 더 급급하다는 느낌이다.

야당이 이 사건을 빌미로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평소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던 시민단체가 촛불 집회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보면서 석연찮은 느낌이다. 끔찍한 비극이 발생하기만 기다리고, 그런 사건이 발생해야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자기 역할을 찾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법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헌법 위에 떼법이 있다’는 말이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된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사건의 처리도, 미친 소보다 이념적으로 미친 사람들의 문제가 더 심각했던 광우병 난동도, 촛불 난동에 이어지는 탄핵 광란도 모두 이 나라의 법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음이었다.

법치가 무너진 나라는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는 법치 질서 붕괴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경고음은 여전히 울리고 있고,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나라를 기어이 무너뜨리고 말겠다는 미치광이들을 언제쯤이나 침묵시킬 수 있을까.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