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강원 춘천

서울서 100km 1시간이면 닿아...명동 어느 한켠서 첫사랑 조우할수도
물줄기따라 구불구불 호반도로 달려 지독한 사랑이야기 깃든 청평사로

물안개를 피워올리는 소양강.
물안개를 피워올리는 소양강.

12월 어느 날 춘천에 갔다. 새벽녘 소양호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를 보며 첫사랑을 떠올렸다. 경춘선 열차에 올라 두근대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쯤 에서 환하게 살고 있을는지. 청평사며 공지천, 명동 골목을 걷다 보니 문득 가슴 한쪽이 찡해졌다.

"춘천은 이름 자체가 ‘바로 그곳’ 이다. 아직도 가보고 싶고 가서 살고 싶어지고 사랑해 마지않을 꿈속의 여인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바로 그곳. 고향 같으면서도 고향 이상의 상상 속의 어여쁜 도시."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란 시를 쓴 유안진 시인은 춘천이라는 도시를 두고 ‘사랑해 마지않을 꿈속의 여인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바로 그곳’ 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춘천은 그럴 것 같다. 춘천에 가면 그리웠던 누군가를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문득 만나게 될 것만 같고, 안개 가득한 호숫가 찻집에서 그 사람과 말없이 차 한잔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인 상처가 말끔히 치유될 것만 같다. 춘천에 가면 정말로 그럴 것 같다.

그래서, 12월 어느 날 춘천엘 갔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길을 나섰다. 차에 설치된 온도계는 영하 1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개 속 자리한 몽환의 도시

춘천은 참 가까웠다. 한때 경춘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낭만을 상징하던 그 길을 따라 열차를 타고 가야만, 아니면 경춘가도라는 구불거리는 국도를 한참이나 따라가야만 당도할 수 있었던 도시 춘천. 언젠가 서울과 이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가 생겨났고, 정체시간을 피하면 1시간도 걸리지 않고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도시가 됐다.
그래도 춘천은 춘천이다. 물리적 거리가 줄었다고 그리움의 거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춘천의 좌표는 그리움과 추억과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춘천은 서울에서 100km 남짓 떨어진 도시가 아니라 5년, 10년, 혹은 20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것이다. 

소양강처녀 동상.
소양강처녀 동상.

춘천IC에 내려서자 동이 터 왔다. 핸들을 돌려 곧장 소양호로 향했다. 날씨가 차니 해 뜰 무렵이면 호수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로 가득할 것이었다. 첫사랑처럼 아련한, 희미한, 애틋한 물안개, 그 물안개가 보고 싶었다.

춘천은 ‘안개 도시’다. 연중 250일 이상 안개가 핀다. 새벽녘이면 소양호와 의암호, 춘천호에서 쏟아져나온 안개가 도시로 밀려든다. 안개는 길을 지우고 사람을 지우고 키 큰 포플러나무를 지운다. 1970~80년대 청춘을 보낸 중년들이 춘천을 가장 낭만적인 여행지로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춘천의 안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역에 내린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몽환 같은 안개 속으로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으리라.

충주호와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큰 호수로 꼽히는 소양호. 지금이야 단지 물을 가두는 댐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때 소양호에는 양구와 인제까지 다니던 배가 있었다. 겨울 속초나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내설악의 코앞까지 다가서곤 했다. 하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들일 뿐이다. 지금 소양호를 다니는 배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고작 10분 내외의 청평사까지 가는 유람선 뿐이다.

어쨌든, 소양호의 거대한 담수량이 만들어내는 겨울 안개는 두껍다. 일교차가 큰 가을 무렵이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같은 겨울철은 차가운 수면을 어지럽히는 물안개가 핀다. 분분히 피어오르는 안개 속으로 물오리가 떼를 지어 유영하고 수초는 희디흰 서리꽃을 덮어 쓴다. 이런 꿈결 같은 풍경은 오직 춘천에서만 볼 수 있다. 물안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소양5교다.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다.

소양호 유람선.
소양호 유람선.

오전 7시. 호수 옆 비포장도로는 이미 사진작가들의 차들이 늘어서 있다. 2월 무렵이면 상고대를 찍으려는 작가들로 소양호의 아침이 분주하다.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아침 햇살이 수면 위로 사금파리처럼 뿌려지고 우유빛 안개가 피어오른다. 햇살과 안개가 뒤섞여 호수는 어지럽고 어렴풋하다. 어쩌면 우리 기억 속의 첫사랑이 이런 모습일지도. 오직 잔상으로만 남아있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안개 같은 풍경.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추억 때문인지 잠시 콧등이 시큰하다.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

운치 가득한 소양호 뱃길은 사라져 버렸지만, 소양호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구불구불한 길은 남아있다. 오봉산 자락의 배후령을 타고 넘어가는 호반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이 길을 구불거리며 따라가면 청평사에 닿는다.

고려 때인 973년에 세워진 이 천년고찰은 젊은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사로 유명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절까지 약 2km. 울울창창한 숲길이 이어지는데 절도 절이지만 절까지 이르는 이 숲길이 여간 운치 있고 좋은 것이 아니다. 청평사를 찾는 연인들은 배를 타고 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제법 근사한 데이트를 하는 셈이겠다. 게다가 이 절에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마저 깃들어 있으니, 연애의 감정을 북돋우는데도 더없이 좋겠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옛날 당나라 태종에게 어여쁜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공주를 짝사랑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 청년이 평민이었다는 데서 비극이 시작된다.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총각은 상사병에 걸렸고, 왕은 청년을 죽인다. 하지만 죽어서도 공주와 함께하겠다는 총각은 상사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다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공주가 야위어가자 부처님에게 빌어 보기로 하고 발길이 닿은 곳이 고려의 청평사다. 밤이 늦어 동굴에서 노숙을 하고 이튿날 잠깐 불공을 드리고 오겠다는 공주의 말에, 어찌 된 일인지 뱀은 10년 만에 떨어져 주었다. 하지만 기다리다 조바심이 난 상사뱀은 공주를 찾아 절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청평사 회전문 앞에서 벼락을 맞고 폭우에 떠밀려 죽고 말았다.

이디오피아 벳.
이디오피아 벳.

청평사 회전문은 상사뱀이 돌아 나갔다고 해서 회전문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름이 회전문이라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을 생각하겠지만 청평사 회전문은 ‘回轉門’이 아니라 ‘廻轉門’으로,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이다.
춘천 제일의 번화가는 명동이다. 한때는 가난한 대학생 연인들이 닭갈비를 먹으며 낭만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곳. 이제는 춘천 제일의 번화가로 변한데다 번듯한 닭갈비 골목도 만들어져 있어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그 옆은 중앙시장이다. 소머리국밥이나 강원도식 메밀전병을 부쳐내는 집이 있고, 닭전이며 순대집들도 있다. 춘천에서 가장 큰 시장이지만 구색이 조촐하다. 

춘천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이들은 공지천의 에티오피아 참전비 옆에 들어선 ‘이디오피아의 집’을 기억하리라.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비 옆에 들어선 이 카페에서는 당시만 해도 흔히 맛볼 수 없는 원두커피를 냈다. 1968년 개업이래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이야 그 풍경이 영 을씨년스럽다. 찾는 이 별로 없는 카페 안은 한산하기만 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공지천으로 간다. 의암호는 두텁게 얼었다. 오리배는 오도 가도 못한 채 호숫가에 정박해 있다. 시간도 얼어붙어 호수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고보니 춘천의 이름은 봄내다. 봄 춘(春), 내 천(川). ‘봄이 오는 시내’란 예쁜 이름이다. 머지않아 봄이 당도하겠지. 물안개 말고 봄 아지랑이가 이 도시 곳곳에서 어지럽게 피어오르겠지. 그때쯤 다시 와야겠다. 소양호나 망대골목 어디쯤에서 혹은 명동 어디쯤에서 우연인 듯 첫사랑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여행 정보]

샘밭막국수의 막국수.
샘밭막국수의 막국수.

춘천의 별미는 단연 막국수와 닭갈비. 막국수는 소양호 가는 길에 자리 잡은 샘밭막국수(033-242-1712)가 가장 유명하다. 닭갈비는 온의일점오닭갈비(033-253-8635)와 우성닭갈비(033-254-0053) 추천. 대원당(033-254-8187)은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1968년에 문을 열었다. 달콤한 잼을 바른 맘모스빵과 부드러운 크림이 듬뿍 든 버터크림빵이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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