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5) 한총련의 몰락과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결성

2000년 들어 한총련 가입 대학은 200여 개서 40여 개로 급감
한대련, 2002년 준비조직 구성...2005년 전국조직 구축 시작
한총련보다 확실히 온건해졌고 생활과 밀접한 투쟁에 머물러

2011년 6월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실현 촉구 촛불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들고 청계광장 인근을 행진하고 있다.
2011년 6월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실현 촉구 촛불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들고 청계광장 인근을 행진하고 있다.

96년 연세대 사태에 이어 97년 남총련과 한총련에서 벌어진 이종권, 이석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은 한총련에게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안겨줬다.

그러나 한총련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연세대 사태는 김영삼 정권의 탄압 때문이라며 철수를 주장했던 온건파를 적과 내통한 자들로 몰아세웠고, 이종권, 이석 씨를 고문하여 사망케 한 것은 경찰의 프락치 공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한총련의 태도는 86년 건국대에서 벌어진 ‘애학투’ 사건과 비교된다. 즉, 86년 건국대 사태 이후 ‘애학투’는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격 투쟁을 조장하는 ‘서클주의’를 해체하고, 학생회 중심의 대중노선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과 연합하게 되었고,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반면, 96년과 97년의 한총련은 반성하고 혁신하기보다는 더욱 극렬해졌으며, 경찰의 프락치 공작에 대한 경계심과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보안 당국의 ‘프락치 공작’에 예민해진 상태로 대처하다 보니 선량한 젊은이였던 이종권, 이석 씨를 프락치로 몰아 고문하고 사망케 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결국, 한총련은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적단체 혐의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김대중 후보에 의해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성사되었음에도,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로 야권연합 전술을 선택했음에도 한총련에게 대선 승리의 기쁨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승리하고,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성사되었음에도 한총련에게 대선 승리는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는 한총련이 따르던 범민련 남측본부, 경기동부연합 등의 종북 주사파들도 마찬가지였다. 97년 대선 승리는 DJP연대에 의한 승리일 뿐, 한총련이나 재야 민주화운동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적단체가 된 한총련, 몰락의 길을 걷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한총련에 대한 탄압은 여전했다. 그런 가운데 98년 7월 대법원에서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판결이 이뤄졌다. 예전에는 전대협 ‘조통위’나 정책실 등 특정조직을 이적단체로 판결했지만, 이번엔 한총련 전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한총련 전체가 이적단체가 된 것에 대해 법을 잘 모르는 한총련의 직업적 운동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한총련에 가입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은 물론 단과대 간부만 되더라도 곧바로 이적단체 성원이 되어 수배상태가 되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장에 당선되자마자 사법처리가 두려워 한총련 탈퇴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전엔 비운동권 총학생회조차 한총련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운동권은 고사하고 PD나 NL비주사 계열의 총학생회장이 선출되면 곧바로 한총련을 탈퇴하였다.

물론 98년 7월 대법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뒤에도 한총련의 활동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활동과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3년 동아대에서‘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시작되어 2005년~2008년에 한대련이 발족한 후 2008년 제16기 의장 선출에 실패하면서 한총련은 거의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16기 한총련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언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총련은 올해 초 내부 합의를 거쳐 조선대 총학생회장 최모 씨를 단독후보로 내정한 바 있다. 한총련이 정한 16기 의장 선거의 후보자 등록 마감 시한은 2월 15일. 예정대로라면 최씨의 단독 입후보로 2월 중 의장 선출이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최씨가 한총련 의장 선거 출마 의사를 번복하면서 한총련은 혼란에 빠졌다.

이와 관련, 한총련의 한 관계자는 "최씨는 중앙위원회에서도 과반의 지지를 받아 의장 후보로 내정돼 사실상 의장 선출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최씨 가족이 완강하게 만류해 결국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병을 앓고 있는 최씨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가 결정적 이유가 됐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한총련 지도부는 후보 등록 시한을 한 달간 연장하고 서울의 한 사립대 총학생회장과 영남지역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에 또 다른 총학생회장들에게 설득을 시도했지만 하나같이 "등록금 투쟁 등 학내 현안이 많다"거나, "소속 대학 활동에 소홀해진다"며 출마를 거부했다.

결국, 후보 등록 시한 연장에도 출마자가 없자 한총련은 3월 29일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16기 한총련 투쟁본부장’으로 추대하고 16기 집행부를 비상대책위(이하 비대위) 체제 형태로 가동하였다. 이러한 것은 한총련 의장으로서의 정치적 프리미엄도 사라지고, 이적단체 규정으로 사법처리 부담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인용)

이런 모습은 한총련만이 아니었다. IMF구제금융 사태를 지나며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때문에 학업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골몰했다. 그에 따라 운동권에 대한 여론이 점점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한총련 의장이 될 경우, 쏟아질 학내 비판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실제 2008년 3월 29일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 장소를 제공한 한양대 총학생회의 경우 ‘한총련에 장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대의원대회 이후 학생들은 학교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한총련에 장소를 제공한 것이 말이 되느냐"며, "총학생회가 학생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2000년에 들어와 대학가의 탈이념, 탈 한총련, 탈 운동권의 바람으로 인해 한총련 가입 대학 수는 200여 개에서 40여 개로 줄어들었다. 대부분이 호남 등 지방대로 서울 소재 대학은 손을 꼽는 정도다. 그나마 서울의 운동권이 총학생회를 차지한 경우는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쪽으로 기울었다.

한총련을 대신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은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이 분열되어 몰락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전국 운동권 대학생 연대조직이다. 2002년 동아대 총학생회에서 ‘새 학생운동 연대체’ 구성을 위한 준비조직이 생겼다가, 2005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진보연대 출범식 및 2007년 투쟁선포식'에서 오종열 총회의장(맨 왼쪽)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07년 1월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진보연대 출범식 및 2007년 투쟁선포식'에서 오종열 총회의장(맨 왼쪽)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대련’에 대해 당시 학생운동가들은 ‘21세기’라는 약칭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는 한대련은 한총련을 계승하였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근래 민주당의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강훈식(건국대), 박주민(서울대), 강병원(서울대) 의원 등이 한대련 출신이다. 한대련의 활동은 재야와 연대 활동에서 한총련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총련의 몰락은 한대련 때문이기도 하다. 즉, 법원에 의해 이적단체가 된 한총련의 간부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한대련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따라서 한대련은 한총련과 같이 종북 주사파로 일색화되지는 않고 범 NL과 PD진영의 학생운동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이 발족하기까지 학생운동은 한총련과 한대련의 양축으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한대련 활동이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에 2008~2018년은 한총련과 한대련, 또는 ‘비 한총련’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정치성향으로 보면 한대련은 NL진영이 주축을 이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등에선 한대련을 경기동부그룹이나 다름없다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한대련의 또 다른 특징은 한총련과 달리 덕성여대, 숙명여대 등 여대가 주류로 등장했다. 95년 이후 한총련에는 여대생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현상이 보였는데, 이것이 한대련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한대련의 활동은 한총련보다 확실히 온건해졌고, 정치투쟁보다는 등록금 투쟁 등 대학생 생활과 밀접한 투쟁에 머물렀다. 뉴라이트 운동 등 새롭게 형성되던 우파 대학생 운동과 종북 과격주의로 치달아 몰락하게 된 한총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대련은 특정 이념적 성향이 지배적인 대학생 조직은 아니었다.

굳이 한대련의 이념적 성향을 분류하면 처음부터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한총련 혁신계열(사람사랑)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던 한총련 계열, 그리고 PD진영으로 나뉜다. 전국에서 대략 80여 개의 대학이 한대련과 연대하고 있으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2011년 대학생 등록금 반값 요구 촛불집회를 전개한 바 있다.

이들은 전국연합의 후신인 한국진보연대(진보연대)와 관련이 깊은데, 전국연합-한총련의 자리를 진보연대-한대련이 물려받은 것으로 보면 된다. 또, 오프라인 중심의 한총련과 달리 온라인 활동과 연합동아리 활동이 두드러졌다. 초기 ‘디씨 겔’을 물론 후마니타스 연대, 청춘의 지성, 역사동아리, 쏘셜메이커(진보사회토론동아리) 등의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했다.

하지만, 한총련과 같은 영향력이나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그만큼 2000년 이후 대학가에서 조직적 행동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또 한총련처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나 기소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념적 활동에 대한 대학생들의 거부감이 심했다.

다만, 2002년 말,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2008년 광우병 파동, 2016년 ‘탄핵촛불집회’처럼 국가적 이슈와 대중들의 참여가 집중될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 이후 학생운동은 전대협과 한총련과 달리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 주력부대의 지위를 잃었다. 그 지위를 대신한 것이 민주노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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