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영
이대영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개인이 겪는 통과의례가 있듯이 온갖 커뮤니티도 통과의례를 겪는다. 기업이나 국가의 설립과 흥망성쇠가 그것이다. 정치적인 통과의례는 "사회드라마(Social Drama)"라고 부른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nner)의 말이다.

사회드라마는 분리, 전이, 재통합의 단계로 전개된다. 평화롭던 공동체가 누군가의 공공질서 위반이나 파괴를 통해 파열된다. 돌발 이슈에 대한 찬반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많은 사람이 공공질서를 해(害)하는 행위에 동조하며 급속도로 전이(轉移)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전이의 단계에서는 기존의 법과 권력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동체가 공멸할 것을 우려하며 법조인, 성직자, 교육자, 지식인 등 사회적 명망가들이 나서서 재통합(redress)을 도모한다. 성경의 출애굽기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의 모든 전쟁과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등이 이러한 사회드라마의 과정을 거쳤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시작된 사회드라마의 도정(道程)에 있다. 탄핵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히 파열되며 양분되었다. 좌우로 나뉜 진영의 골은 더 깊어졌다. 촛불혁명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조장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몰살하고 국방·외교 문제까지도 함부로 건드렸다. 한일(韓日) 간의 관계는 시한폭탄이 됐고, 한미(韓美) 군사동맹에도 균열이 갔다. 남북관계도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다.

국내적으로도 원전(原電)은 물론이고 온갖 사회 이슈에 대하여 개인의 철학적 사유, 합리적 의문, 지적인 대화는 봉쇄되었다. 전문가의 고언은 대나무숲에 뿌려지는 핏빛 비명일 뿐이다. 법원의 권위도 이념의 칼날에 무너졌다. 검경은 제 진영 돌보기에만 바쁘다. 국회는 미래를 돌보지 않고 우왕좌왕하며 과거 타령만 하고, 중심을 잡아야 할 청와대마저 정치적 선동의 언사로 국민통합을 저해했다.

노동단체들은 부자의 곳간을 털자며 감정적으로 기업가들을 공격하고, 언론은 저널리즘에 입각한 정론보다는 주관적 쾌락을 부추기고, 지식인은 침묵하고, 종교인은 잠행하고, 원로는 눈을 감고 있다. 개인들도 자아를 걸어 잠근 채 묵언 수행 중이다.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와 정의와 평화와 인권과 생명을 외치지만, 이 모두가 권력의 편에서 추구하고 추앙해온 허상이요 거짓이었다.

사회드라마의 끝은 결국 권력 구도의 재편이다. 과거로 가는 열차에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니 나는 미래를 향해 있다고 자위하는 순간, 나도 우리도 대한민국도 없다. 과거로 가는 열차를 붙잡아 세우고, 새 기관차로 교체하고 다시 미래로 출발해야 한다. 이번 대선이 가지는 의미다.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도 탄핵의 사회드라마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가혹한 자연환경이나 외적의 침입 등 이러한 외부의 도전에 대하여 해당 공동체가 응전에 성공하면 계속 존속해 발전할 수 있고, 응전에 실패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공동체 내부 분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할지, 구한말처럼 주저앉을지 선택의 기로이다. 한류 문명이 피어나기도 전에 소멸하게 놓아둘 것인가.

대한민국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길은 하나이다. 우리 각자가 바로 서는 것이다. 천하흥망(天下興亡)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고 했다. 필부가 바로 서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각자 고민해야 할 때다. 개인의 자유와 자존이 상실된 공동체는 깨진 거울이고 그림이다. 거울 속에서 살 수 없고 그림 속의 과일을 먹을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와 자존의 완전한 구현과 회복, 그것만이 전이 공간을 빠져나가며 다시 빚을 이 나라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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