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희

3·9 대선을 불과 25일 남긴 현 시점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여론이 뜨겁다. 현재 대선 레이스는 2강(윤석열 국민의힘·이재명 더불어민주당), 1중(안철수 국민의당), 1약(심상정 정의당) 구도다.

만약 윤 후보가 안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게 된다면 이번 대선에서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는 거의 확실시된다. 하지만 단일화가 무산된다면 이 후보의 당선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물론 안 후보는 거듭 대선 완주의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호의적으로 평가해도 안 후보의 당선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후보가 계속 완주의지를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여권에서 윤 후보와 안 후보의 단일화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과제로 보고 있다. 야권 단일화는 여권의 필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계산인 셈이다.

1987년 13대 대선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높다는 점 △야권 단일화가 정권교체의 핵심요소로 거론된다는 점 △야권이 분열돼야 여권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이다.

1987년 대선에는 3강 1약 구도였다. 3강이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YS) 후보, 평화민주당의 김대중(DJ) 후보 그리고 1약이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JP) 후보였다.

1987년 10월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서의 김대중(왼쪽)과 김영삼. 같은 해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가지만 해도 우호적이었던 두 사람은 이 토론회를 기점으로 사실상 결별의 길을 걷는다. 이로 인해 13대 대선 야권 단일화 논의는 삐걱대기 시작했고, 결국 두 후보간 단일화는 무산됐다. 어부지리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민중의 열망은 5년을 더 기다리는 결과를 맞았다. /디지털아카이브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YS와 DJ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YS는 군사정권에서도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야당 총재로 활동했기 때문에 통일민주당 창당에서부터 주 세력은 YS의 상도동계였다. 반면 DJ는 유신 이후 국내납치, 체포, 투옥, 사형선고, 미국망명 등으로 세력 기반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 통일민주당 내에서의 지분이 빈약했다.

그럼에도 13대 대선을 앞두고 군사정권의 연장을 막기 위해 YS와 DJ가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는 여론이 강했고, YS와 DJ는 이 해 10월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에 동반 참석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역사적인 단일화 발표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YS는 고려대학교에 모인 청중들로부터 야유를 받고 굴욕적으로 토론장을 떠났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DJ는 청중들의 환호 속에 성공적으로 연설을 마쳤다.

결국 DJ는 ‘4자 필승론’을 내세우며 독자 출마를 예고했다. 야권 단일화가 안되더라도 본인의 당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최종담판에서 YS가 DJ의 요구사항을 전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야권단일화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자 DJ는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하며 평화민주당을 창당했고 야권단일화는 결국 무산됐다.

하지만 DJ의 4자 필승론이 나오자 선거의 승리를 확신한 것은 DJ가 아니라 여권이었다. 야권 후보의 분열은 전두환의 5공 정부가 가장 바라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5공 측은 영남지역 표심이 노태우와 YS로 분열되더라도, 야권이 DJ와 YS로 분열되는 상황이 더 확실한 필승의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을 은밀히 동원해 DJ가 대선을 완주하도록 지원했다. 일설에 따르면 고려대학교 시국토론회에서 YS에게 야유를 퍼붓도록 주동한 사람들이 안기부의 지시를 받은 ‘관제청중’이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한 6·29 선언의 전말에 대해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김대중을 풀어 출마하도록 하는 걸 의미한다"며 "꼭 김대중과 김영삼, 이 두 사람이 갈라져서 따로따로 후보로 나와야 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국 승자는 노태우 후보였다. 그는 36.6%에 불과한 낮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야권 단일화가 무산된 데 따른 ‘어부지리’였다. 4자 필승론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던 DJ는 27.1%의 득표율로 YS에게도 뒤진 3위에 그쳤다.

지지율에서 밀리는 여권이 내심 가장 바라는 상황이 바로 1987년의 재현이다. 우상호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안 후보가 자존심이 없는 분도 아니고"라며 완주를 종용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 학습의 결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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