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국내 언론의 시야는 용산(대통령실)에서 여의도(국회)까지다. 태평양(미국)은 물론 서해(중국)-동해(일본)도 미처 살피지 못한다.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관찰하는 시야가 결여된 탓인데, 그런 맹점이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사망을 전하는 최근의 부음기사에서 재확인됐다. 도무지 피아(彼我) 구분을 채 못하는데다가 역사 건망증도 걱정되는 수준이다.

키신저 사망 보도에서 거의 모든 신문은 그를 외교의 거인으로 칭송했다. 냉전시대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 죽의 장막을 열었던 그의 공로는 물론 빛난다. 문제는 국익에 부합한다면 적과도 타협했던 현실정치 측면이다. 그게 한국현대사와 주변정세에 끼쳤던 빛과 그늘을 냉철히 따져 묻는 문제의식이 우리 언론엔 없었다.

일테면 그는 월남 공산화에 원인을 제공했던 인물이다. 1973년 월맹(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을 무작정 철수시키는 바람에 2년 뒤 월남(남베트남)은 지도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건 우리에게 지금도 반면교사이자, 현재진행형의 악몽이 아니던가? 평화협정에 대한 한국 좌파의 집착을 감안한다면, 키신저가 남긴 명암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건 당연했다. 키신저는 또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을 무산시킨 인물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키신저가 남긴 양면을 두루 재조명했어야 옳았다. 무엇보다 키신저의 유산 중 지구촌의 골칫덩이로 떠오른 현대 중국의 문제를 뺄 수 없다. 키신저에 비판적인 대만 등은 그를 숫제 중국 대변인이라고 때린다. 근거 있는 지적이다. 실제로 키신저는 사망 전인 7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으로부터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란 찬사를 받았다.

적으로부터 찬사를 받는 장수는 위험한 법이다. 물론 중국이 우리의 적이란 말은 아니다. 다만 친구이자, 견제해야 할 위험한 이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신저의 최대 실수는 중국을 과도하게 띄워준 대목이었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뜻이 없다"고 그는 역사적 오판을 했던 것이다.

중국 전문가 유광종이 예전 이런 말을 들려줬다. "그의 만년 저술 <중국 이야기>는 원제목이 ‘On China’인데, 내가 볼 땐 ‘Under China’다. 중국에 비굴할 정도라서 읽기에 민망하다." 맞다. 키신저가 됐든 뭐가 됐든, 세상을 주변 정세를 우리 시각으로 바라보는 언론의 능력이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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