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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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Maestro), 비르투오소(Virtuoso)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극존칭 용어다. 그런데 정확한 어원과 의미도 모른 채 오용, 남용되는 경우가 허다해서 그 고귀한 의미가 점점 희석되고 있다.

이탈리아어 마에스트로(Maestro)의 기원은 라틴어 마지스터(Magister)에서 유래했다. 영어로는 마스터(Master), 독일어로는 마이스터(Meister)다. 모두 장인(匠人)·달인(達人)·대가(大家)라는 뜻이다.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단어지만, 보통 클래식 음악계에서 지휘자를 높여 부를 때 쓰는 호칭으로 굳어졌다.

최근 개봉한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영화 ‘마에스트로’나 얼마전 종영한 이영애 주연 드라마 ‘마에스트라’(Maestra; 마에스트로의 여성형 명사)는 주인공인 남성 지휘자 번스타인과 여성 지휘자 차세음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마에스트로는 지휘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특별한 존칭이다. 정확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번스타인 말고도 푸르트뱅글러·첼리비다케·귄터 반트·카라얀·뵘·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이 이견 없는 마에스트로이고, 생존 지휘자 중에는 블롬슈테트·바렌보임 등에게 마에스트로를 붙일 수 있다.

역시 이탈리아어인 비르투오소는 ‘고결한’, ‘덕(德)이 있는’ 의미를 내포한 라틴어 비르투(Virtu)에서 유래했다. 비르투오소의 한국어 표기도 장인·달인·대가다. 그런데 비르투오소는 마에스트로보다는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판 ‘스페셜리스트’의 의미가 좀 더 강하다. 그래서 지휘자 이름에는 붙지 않고, 범접할 수 없는 기량과 탁월한 예술성을 갖춘 클래식 명연주자에게 붙이는 호칭이 됐다.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는 파가니니·사라사테·크라이슬러, 피아노 연주자 중에는 리스트·알캉·라흐마니노프가 있다. 이름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전설들이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아르투르 루빈슈타인·블라디미르 호로비츠·클라라 하스킬·야샤 하이페츠·레오니드 코간·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도 자타가 공인한 비르투오소다. 이들은 음반을 많이 남겨 놓아, 그 불멸의 예술성을 후세의 청각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라는 단어에는 수많은 경험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깊은 철학이 내포돼 있다. 즉 거장이 완성되려면 ‘축적된 시간’이 필수 불가결하다. 혜성같이 나타난 20대 지휘자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천재적 해석을 내놓더라도, 절대 마에스트로를 붙이지 않는다.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은 패기 넘치는 젊은 지휘자가 브루크너 교향곡 9번, 말러 교향곡 9번과 ‘대지의 노래’, 바그너의 ‘파르지팔’ 등 위대한 작곡가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명작에 도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축적된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재능있는 지휘자일 뿐 마에스트로가 아니다.

수많은 10대 음악 신동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탁월한 기량을 공인받기 위해 콩쿠르에 매진한다. 콩쿠르에 입상한 젊은 연주자들의 손가락 돌아가는 속도를 보면 실로 놀랍다. 전설의 하이페츠나 관록의 호로비츠를 능가한다. 세상에 신동은 많지만 성숙의 시간을 축적해 비르투오소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테크닉만 뛰어난 젊은 연주자들을 절대 비르투오소라 부르지 않는다.

요즘 세상, 노련하고 깊은 늙음이 천대받는 분위기다. 사회적으로 젊음의 패기와 도전 정신을 북돋아주는 것은 옳다. 하지만 젊음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축적’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젊음에게 늙음은 경험치 못한 미래지만, 모든 늙음은 젊음을 경험했다. 젊음뿐만 아니라 열광·실패·성취·좌절 등 긴 시간이 숙성되어야만 비로소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가 완성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70대 시인 이적요가 하는 명대사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늙음은 마에스트로와 비르투오소에게 시간이 준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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