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여진

2024년 1월 대학로 일대에서 어린이 청소년 예술 공연 축제인 ‘2024 서울 아시테지 겨울 축제’가 열렸다. 아시테지(ASSITEJ)는 프랑스어 Association Internationale du Theatre pour l’Enfance et la Jeunesse의 약자로 우리말로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다. 올해는 ‘공존’(共存)을 주제로 연극·전시·체험·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 중 가장 주목 받은 공연은 창작조직 성찬파의 연극 ‘어둑시니’였다.

극단명이 좀 살벌하지만, 단 일곱 글자에 극단의 외형과 방향성을 모두 담고 있다. 하나씩 곱씹어 보면, ‘창작극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박성찬 연출과 그와 연대한 사람들’이다. 극단을 이끄는 ‘두목’ 박성찬 연출은 대학로에서 통뼈가 굵은 연출가이자 극작가 그리고 인형, 소품, 무대 디자이너다. 그는 2022년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반쪼가리 자작’을 무대에 올려 큰 성과를 거뒀다. ‘반쪼가리 자작’은 여러 연극상을 휩쓸고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공연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전작의 기세를 이은 성찬파의 야심작인 ‘어둑시니’는 우리나라 전통 요괴 이름이다. 관심을 받으면 몸집이 커지고, 관심을 받지 못하면 크기가 점점 작아져 소멸하는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박성찬 연출은 이 특징을 과도한 관심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에게 이식하고, 아쉽게 잊혀가는 우리 전통문화에 얹었다.

어느 날 요괴들의 세상에 인간아이가 떨어진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지만, 소멸 직전의 어둑시니와 아이는 친구가 된다. 둘은 좋은 관심과 나쁜 관심을 구분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고 아쉽지만 희망차게 작별한다.

다섯 배우는 또 다른 우리 전통 요괴인 멍석이·대괴면·야광귀·두두리·삼구귀로 열연을 펼치면서 다양한 소품과 묘기를 엮어 어둑시니를 연기한다. 동시에 요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인간아이 인형까지 조정해야 하니 기본 1인 2역을 소화한다. 모든 배우가 동시에 한 덩어리처럼 어우러져 연기할 경우 대사 한마디, 사인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 틈이 흉측하게 벌어져 극의 흐름이 뚝 끊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연극 ‘어둑시니’ 배우들은 그럴 틈을 전혀 주지 않았고, 연출은 혹시라도 있을 틈을 조명과 소품 그리고 음악으로 철저히 메워놓았다.

연극 ‘어둑시니’의 세부 장르는 오브제 극이다. 두 주인공인 인간아이와 어둑시니는 모두 배우가 조종하는 인형일 정도로 오브제가 극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오브제 극은 노련한 소품 디자이너이기도 한 박성찬 연출의 장기다. 전작인 ‘반쪼가리 자작’에서도 오브제를 다루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인형은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연극의 인형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장인의 꼼꼼한 손길이 깃든 정교한 예술품이다. 예술인형과 연극배우가 함께 있는 무대. 이 위에서 배우는 오브제가 되고, 오브제는 배우가 된다. 연출의 의도는 오브제와 배우의 기묘한 상호 작용에서 환상과 동화를 끌어내어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 의도는 늘 그리고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둑시니’는 제목과 외형만 보면 어린이 인형극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아니다. 어린이들은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배우들의 전래 동화 같은 야단법석에 홀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사이, 어른들은 소품과 무대의 예술성과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이야기 속에 연출이 툭 던져놓은 주제에 몰두했다. ‘어둑시니’는 어른들끼리 또는 연인끼리 관람해도 될 정도로 깊고 뛰어난 극이다.

5월에 ‘어둑시니’(세종시 문화예술회관)와 ‘반쪼가리 자작’(강동아트센터)의 재공연이 연이어 있다. 더불어 칼비노의 ‘우리 선조들’ 3부작의 나머지 작품인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도 고대해 본다.

2024년, 연극계를 ‘담그는’ 창작조직 성찬파와 두목 박성찬 연출의 행보가 살벌하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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