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여진

찬란한 햇살, 정열 넘치는 몸부림, 유럽과 아랍이 버무려진 맛, 코끝을 간질이는 지중해의 바람. 지난 2월 2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스페인의 모든 정취를 오롯이 음화(音化)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985년에 창단한 국내 최초 민간 관현악단이다. 2001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 단체로 지정됐고, 2022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 도약했다. 같은 해 벨기에 출신 지휘자 다비트 라일란트(David Reiland)가 제7대 예술감독을 맡은 후, 연주력과 기획력을 끌어올려 한층 더 높은 비상을 하고 있다. 이번 스페인 음악의 향연도 그 당찬 행보 중 하나다.

연주회의 메인 레퍼토리는 스페인 작곡가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기타 협주곡’이었다. 협연은 예정됐던 밀로시 카라다글리치 대신, 국내를 넘어 국제 무대에서도 극찬받는 기타리스트 박규희가 맡았다. 스페인 기타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 그녀의 연주력은 나무랄 데 없었다. 그간 쌓아 온 높은 인기 덕분에 열광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앵콜 역시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었다. 모두가 예상한 앵콜곡이었지만, 연주 시작과 동시에 관객의 집중을 빨아들이는 박규희의 트레몰로는 깜짝 놀랄 정도의 흡입력이었다.

공연의 나머지 세 곡은 프랑스 작곡가가 들려준 스페인이었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샤브리에의 ‘에스파냐’는 스페인을 통째로 악보에 눌러 담은 10분이었다. 스페인 고유의 율동, 스페인 민속 선율, 스페인 타악기가 어우러져 지중해성 기후의 낙천적인 분위기를 한껏 뿜어냈다. 흥에 무너지기 쉬운 음악인데, 지휘자 라일란트는 디테일과 스케일을 양손으로 꽉 잡고 관객의 고막을 뜨겁게 데워냈다.

2부 첫 곡인 드뷔시의 ‘관현악을 위한 영상’ 중 ‘이베리아’는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이기에 기대가 컸다. 음악은 목관악기들을 중심으로 현악과 금관 그리고 타악기가 넘실대는 구조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목관 단원들이 이 원무(圓舞)의 중심점을 훌륭하게 잡아주었고, 현악과 금관도 그 위에 알록달록한 색채를 덧입혔다. 타악기도 감칠맛 나는 향신료를 음악에 뿌렸지만, 박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스페인 고유의 생생한 열정이 좀 희석된 인상이었다.

마지막 곡은 라벨의 ‘볼레로’였다. 1928년 무용 반주 음악을 의뢰받은 라벨은 스페인의 민속 춤곡 ‘볼레로’를 혁신적 구조와 현대적 세련으로 조탁했다. 공들여 완성한 ‘볼레로’는 15분에 걸친 하나의 크레셴도(점점 크게)다. 느릿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두 주제를 여러 악기가 솔로로 연주하면서 음량이 조금씩 커지다가, 마지막에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큰 볼륨으로 음악을 폭파한다.

라벨 ‘볼레로’에서 악단의 실력은 독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지휘자의 실력은 전체 음량 조절에서 판가름 난다. 1985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로 시작해 39년 꾸준한 연주력을 축적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로 재탄생한 악단이다. 지휘자 라일란트는 연주력의 역사를 ‘볼레로’에 응축했고, 화려한 시간의 불꽃으로 터뜨려냈다.

앵콜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중 ‘스페인의 춤’이었다. ‘프랑스가 바라본 스페인’이라는 메인 디시에 ‘러시아가 들려주는 스페인’이라는 디저트를 준비한 기획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덧붙여 이번 연주회의 포스터를 그린 나승준 작가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포스터는 ‘불꽃놀이’(Firework)라는 콜라주 작품으로 기타를 중심으로 다양한 악기들이 폭죽처럼 펼쳐져 있었다. 청각을 시각화하려 했던 칸딘스키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하단에는 작은 북을 든 작은 꽃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1, 4, 4, 1 - 1, 4, 9송이인 걸로 보아 ‘볼레로’의 기본 리듬을 시각화한 것 같았다. 멋진 아이디어다. 이는 콘서트를 단순한 음악회가 아닌 총체예술로 끌어올린 기획력이었다. 2024년 그리고 창단 40주년인 2025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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