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오늘날 소련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주장하던 지난날의 소련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나라로 전락했다. 소련은 단돈 23억 달러에 사회주의 맹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팔아넘겼다." 1990년 6월 북한 노동신문은 옛 맹방 소련을 험하게 공격했다.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대통령과 옛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국교 정상화를 위한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23억 원은 당시 한국이 소련에 제공했던 경제협력기금으로 뒤에 30억 달러로 증액됐다.

북한의 소련 공격은 전에 없던 일이다. 하지만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국교 정상화 D데이를 1991년 1월1일로 잡아놓았는데, 기분이 상한 당시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는 예정일을 3개월 앞당겼다. 새로 확정된 수교일이 1990년 9월 30일이다. "이걸로 북한 친구들도 정신을 차리겠지." 셰바르드나제가 외무장관 최호중 앞에서 했던 혼잣말은 남북한 경쟁에서 북한의 패배를 확인해줬을 뿐이다.

그 바로 1개월 전 중국을 찾아갔던 김일성은 덩샤오핑에게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과연 얼마나 더 붉은 기가 나부낄 수 있을 것인가?" 그때 김일성은 한국과 수교를 하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했다. 소용없었다. 한·중 대사 교환은 1992년에 이뤄졌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가? 그렇게 막을 내린 줄 알았던 북한-러시아 관계가 요즘 아연 밀월 국면이란다.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24년 만에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이다. 푸틴은 2000년 7월 평양을 방문한 바 있다. 그걸 위해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관계자들을 잇달아 만났다.

우린 안다. 지금 양국 관계는 특히 무기 뒷거래를 계기로 반짝 활기를 띠고 있다. 어렵게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의 고물 무기를 대주니 푸틴은 살판이 났다. 그 대가로 북한에 약간의 달러와 함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위성 발사와 관련한 기술을 제공하는 걸로 추정된다.

국제사회 역시 악의 축끼리의 뒷거래를 걱정한다. 푸틴의 추태도 구질구질하지만 정말 문제는 북한이다. 저렇게 한다고 죽은 경제가 일어설까? 이미 망가진 체제에 달았던 산소호흡기를 잠시 연장하는 정도의 효과가 전부이리라. 훗날 역사는 다 죽어가는 두 불량국가의 뒷거래를 어떻게 기록할지가 벌써부터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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