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남정욱

사과,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사과하는 순간, 인정했으니 책임지셔야죠? 하며 바로 파운딩 들어온다. 파운딩은 이종격투기에서 상대를 바닥에 깔아놓고 주먹으로 짓이기는 동작이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된다. 오해 마시라. 어떤 경우에도 절대 사과하지 말라는 얘기 아니다. 함부로 하지 말라는 얘기다. 자칫하면 영원히 발목을 잡을 수도 있기에 조심하라는 얘기다.

사과는 왜 할까. 우리가 사과를 하는 이유는 생존에 필요한 관계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과는 생존과 결부되었을 때만 하는 거다.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악의 사과는 상황을 전혀 역전시키지도 못하면서 사과한 사람에게 불리한 처지가 지속되는 경우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가실 것이다. 김건희 여사 명품 백 수수를 둘러싼 사과 논쟁이다.

실은 문제가 너무 쉽다. 사과는 두 가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먼저 상황의 획기적인 개선 여부다. 대통령이나 부인이 사과하면 사태가 반전될까. 별로 가능성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들, 말 몇 마디에 흔들리는 사람들 아니다. 전전임 대통령이 익사한 아이들을 놓고 눈물로 사과할 때 팔짱끼고 듣던 사람들이다. 나중에는 안약을 넣었다고 조롱했던 사람들이다. 안 하는 게 나았다. 지금 상황과 다를까. 사과할지 말지 결정하는 두 번째 기준은 타이밍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사과를 하면 가래로 막을 거 포클레인으로 막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인가. 역시 별로 아니라고 본다.

그럼 결론은 명확하다. 이 대목에서 야당이 사과하라 난리치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러면 그거 녹음해서 총선 전까지 내내 틀어댈 수 있으니까. 여권 일각에서 사과하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대체 얻을 게 뭐 있다고. 혐의는 둘이다. 세작이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고민 좀 되시겠다. 세작이 아니라고 부인하자니 머리 나쁜 놈이 되고 머리가 정상이라고 우기자니 세작 소리를 듣는다. 그거야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가방을 받은 행위와 사과를 세트로 묶는 스킬을 발휘하는 중이다. 일단 이거부터 분리해야 한다. 행위는 행위이고 사과는 사과다. 중요한 건 그 행위에 앞서 ‘몰래 카메라’라는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의 없는 촬영은 불법이고 인권 침해다. 이 불법은 용인되고 그 함정에 걸린 다음부터만 문제인가. 화력은 이 부분에 집중했어야 한다. 그리고 명품 백은 선물 보관 창고에 보냈다고 하면 끝인 문제였다. 타이밍은 이미 이 대목에서 놓쳤다.

몰래 카메라를 촬영한 목사의 기자회견 동영상이 있다. 너무 재미있다. 사람이 속칭 ‘켕기는’ 말을 할 때는 호흡이 무너지고 말투가 뒤죽박죽된다. 목사의 말씀을 옮기자면, 이전 접견 과정에서 여사가 인사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경악한 끝에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증거 채집을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몰래 카메라까지 ‘작동이 돼서’ 2차 접견 때 그것이 ‘촬영되고’ 공개가 된 것이라고 했다. 증거 채집이라니 이 분은 목사인가 형사인가. 그리고 카메라가 저 혼자 작동이 되고 촬영이 되었다니 귀신이 대신 찍어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압권은 "정(情)을 의(義)로 승화시켰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더니 스스로 평가를 잘해서 민망하다는 자화자찬과 함께, 폭로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바로설 수 없을 것 같아 폭로를 한 것이니 널리 양해해 달라는 부분이다. 범죄 행위를 자백하면서 말투는 거의 안중근이다. 불법이지만 양해해 달라는 말은 성직자(?)와 범죄자의 경계를 허문다. 야당이 이 목사를 지사 대접하며 띄우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과,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사과를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때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잘못이 너무나 뚜렷하므로 사과하지 않겠다." 행위와 사과를 분리하고 사과하되 사과하지 않는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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