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미국에 대한 충성을 거짓으로 맹세함으로써 그 신뢰를 배반하는 것은 법무부가 전권을 행사할 중대한 범죄다." "미국에 대한 맹세를 어긴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우리는 미국 국민에 대한 엄숙한 맹세를 배신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쿠바를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전직 볼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 빅토르 마누엘 로차(Victor Manuel Rocha)가 2023년 12월 4일 미국 연방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법무부 장관, FBI 국장, 법무부 국가안보 담당 차관의 보도 자료를 읽던 필자에게 27년 전 S대 A교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시공(時空)을 떠나 A와 로차가 오버랩 됐다.

A는 남파간첩에 포섭된 후 S대 교수, 대통령 부인 가정교사,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OO학회 회장, OO연구소 소장, OO개발원 원장을 거치면서, 사계의 권위자가 되고 원로교수가 되고 저명인사가 됐다. A는 그렇게 한국 상층부에 침투한 엘리트 지식인 고정간첩이 됐다. 로차는 하버드와 예일을 졸업하고 쿠바 정보총국(DGI)의 지시로 1981년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남미 담당 국장, 하바나 주재 미국 이익대표부 부대표를 거쳐 볼리비아 주재 미국대사로 퇴직했다. 그 후엔 쿠바를 관할하는 미국 남부사령부의 자문역도 맡았다. 로차는 그렇게 ‘미국 정부에 침투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오래 지속된 간첩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A는 6·25전쟁이 일어나던 22세 때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입대했다. 반공포로로 석방됐지만 마르크스와 사회주의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였다.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환상은 김일성 부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으로 나타났다.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한 1973년, 23세 이상주의자 로차는 칠레에서 쿠바 정보기관에 자연스럽게 포섭됐다. 쿠바혁명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카스트로 형제에 대한 절대적 숭배로 나타났다. A와 로차의 배신 동기는 이념이었다. 이념은 독재자에 대한 충성과 숭배를 합리화할 수 있었다.

A는 "국가안보가 좌익세력들에 의해 위기를 맞고 있다. 확고한 자유민주주의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이번 대선에서 보수우익 인사가 꼭 선출돼야 한다"며 어디서나 보수우익 인사로 행세했다. 로차는 ‘쿠바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 한 미국이 쿠바와 관계를 정상화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에게 후원금을 기부했다.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재개하고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트럼프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로차는 그렇게 ‘중도 우파’로 때론 ‘냉철한 보수주의자’로 평가를 쌓아갔다. A와 로차는 거울 속에 또 하나의 자기를 가지고 있었다. 거울 밖의 자기가 진짜 자기가 되기도 하고, 거울 속의 자기가 진짜 자기가 되기도 하고….

A는 ‘OOO’이라는 코드네임까지 부여받고, 36년 동안 6명의 공작원과 접선했던 베테랑이지만, 간첩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남파된 검열간첩의 어이없는 체포로 신분이 노출됐다. 40년 동안 쿠바 간첩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는 로차는 쿠바 정보총국의 검열간첩으로 위장한 FBI 수사관에 어이없게 속아 신분이 탄로났다. 36년, 40년의 신공(神功)이 한순간에 겸연쩍고 부끄럽게 됐다.

A(69세)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3개월을 복역한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로차(73세)는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될 경우 최대 징역 60년을 선고받을 수 있다. 1년 3개월과 60년! 한국은 간첩(間諜)을 양심수(良心囚)라 부르고, 미국은 간첩(espionage)을 배신자(traitor)라 부른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