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간첩이거나 망명자거나 탈북민이거나 신분이 뭐가 되었던 기억력이 한결같이 비상했다. 개정 전엔 5400자, 개정 후에도 2400자가 넘는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이들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 2019년 12월 중국에서 개최된 제28회 세계기억력대회에서 북한이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압록강변의 겨울: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463쪽), <김정일과 대남공작>(334쪽), <곁에서 본 김정일>(282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탄생-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겪은 건국 비화>(395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382쪽). 이 책들은 신경완·서용규·황일호·신평길·최종민·Q씨·S씨 등 귀순자 7명의 증언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재구성한 현대사의 비록들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정원 기조실장을 지낸 서동만 전 상지대 교수가 2005년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서 ‘조국전선 부국장을 역임한 박병엽(가명-신경완·서용규·황일호·신평길)이 망명해 왔으며, 그의 증언은 일부 연구자의 정리를 통해 몇 권의 책으로 간행된 바 있다’고 밝혔다. 위 비록에서 증언을 한 7명의 증언자는 박병엽 한 사람이었다. 사망 후 7년 만에 박병엽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그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웬만한 조선로동당 문헌은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그 많은 당 대회, 당 전원회의, 당 정치위원회 회의 등에서 이뤄진 보고와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비록의 저자들은 그의 기억력에 탄복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를 ‘가공의 인물’로 의심했다. 증언도 그의 기억에만 의존한 것이어서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1970년 남파되자마자 체포되어 1988년 석방된 김진계라는 간첩이 있었다. 1990년 9월 출간한 그의 자서전 <조국: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에 박병엽이 나온다. ‘…20년 전 남파될 때 평양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진 책임지도원을 남쪽에서 다시 만났으니 그 놀라움이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임지도원이 바로 박병엽 선생이다…남조선문제연구소에 있을 때 그는 로동당 고문헌실에 있는 당 문헌과 남북관계 비밀문헌, 남쪽 출신 월북자들의 경력 파일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박병엽의 실존과 그의 정보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병엽은 80년대 초반 제3국을 통해 귀순한 북한 정보요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위급 망명자인 그의 진술은 한국 정보기관들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검증했다. 그의 증언을 책으로 편찬한 저자들도 모두 ‘팩트’를 중시하는 기자와 학자들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증언은 다양한 방증자료에 의해 교차검증 돼야 했다. 이런 박병엽이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한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을 발표하기 이르렀다…엄항섭은 (김구 성명) 초안 작성에 앞서 성시백을 두 차례나 만나 의견 교환을 했다고 한다… 대남연락부장 임해는 김일성에게 "김구·김규식의 (남북 요인회담) 제안은 …김구 주변에 포진한 성시백 인물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보고했다…북로당은 …김구 비서 안우생, 김규식 비서 권태양 등 성시백 선의 실무자들을 비밀리 평양으로 불러 북로당의 입장을 전달하고, 실질적인 사업지침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의 스파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이 100만을 넘었다. 국민이 드디어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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