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주
손광주

14일 김정은의 입에서 ‘해상 국경선’ 발언이 나왔다. ‘연평도·백령도 북쪽’이라는 위치도 언급했다. 김정은은 "서해 NLL은 불법 유령선이니까, 적들(한국 해군)이 침범하면 바로 무력행사 하라"는 것이 요지다. 불시에 우리 함정을 때려 버리라는 이야기다.

북한이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것 같다. 이 게임은 내용이 복잡하고 결말도 쉽게 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11월 미국 대선 때까지 계속되고, 내년에도 우리가 원하는 결말에 이르게 될지 알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서해 도발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1999년 6월15일 1차 연평해전이 있었다. 3년 뒤 2002년 6월29일은 2차 연평해전이다. 1차 연평해전은 대한민국 해군의 압승이었다. 우리 함정을 공격한 북한 함정 10척을 14분 만에 작살냈다. 1차 연평해전 1년 뒤 2000년 6월15일 김대중-김정일의 6·15공동선언이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하루 전날인 6월29일 2차 연평해전이 터졌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참수리 357호가 침몰했다. 윤영하 소령 등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그 배경을 지금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6·15공동선언 후 해군의 교전수칙이 바뀌었다. 북한 함정이 NLL을 넘어와도 우리는 발포하지 못했다. 북한 함정을 부딪치기로 밀어내야 했다. 말이나 되는가. 이순신 장군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당시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국제비서였다. 필자는 통일정책연구소 이념연구실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이사장 주관의 세미나 형식 비공개 공부모임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매주 화·목 2~5시간씩이었다. 필자는 1999년 4월~2010년 10월까지 11년 6개월간, 대강 깎아서 계산해 6000시간 정도를 참석했다.

2002년 북한의 2차 연평해전 도발은 그 배경 분석이 까다로웠다. 김대중 정부가 아낌없이 쌀‧비료‧달러(관광비용)를 북한에 퍼주고 있는데, 어째서 대한민국이 주최한 지구마을 축제인 월드컵 기간에 군사도발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대통령이던 DJ조차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 나간 놈들 아닌가. 다음은 2차 연평해전 직후 황 이사장의 설명이다.

"첫째, 1차 연평해전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북한 해군(8전대)의 복수전이다. 둘째,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월드컵 기간을 이용해 서해 NLL에서 군사도발을 함으로써, 김정일이 미국을 향해 ‘서해 NLL은 국제분쟁 수역이야!’라는 사실을 크게 상기시키려는 의도다."

서해 NLL의 국제분쟁 수역화! 지금 김정은이 벌이려는 ‘게임’의 본질이 이것이다. 서해 NLL은 남과 북, 미·중의 관계가 얽혀 있다. 중국은 황해(서해)를 내해(內海)로 간주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육상 분계선(MDL)은 확정됐지만, 해상 분계선이 명확히 획정되지 않았다. 당시 유엔군은 제공‧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뼘이라도 영해를 더 넓히려 했던 한국 해군은 신의주 앞바다까지 치고 올라갔다. 김일성과 팽덕회(중공군)가 항의하자,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8월 30일 한반도 해역에서 남북간 우발 충돌을 막기 위해 영해 기준 3해리(당시 국제표준)에 그은 선이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이다. 다시 말해, 클라크 사령관이 "한국 해군은 이 라인보다 더 이상 북으로 올라가선 안돼!"라고 가로막은 선이다. 그래서 이름도 ‘북방 한계선’이다. 전세가 불리했던 북한은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1973년부터 북한이 육상 분계선을 서해 쪽으로 직선으로 길게 그어 서해 5도를 북한 수역에 포함시키고, 200해리 경제수역과 해상분계선 설정하고(1977),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선포(1999), 서해 5개 섬 통항질서(2003) 발표 등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온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김정은이 벌이려는 게임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첫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으로 중동-대만으로 이어지는 지구촌 전쟁의 흐름에 김정은이 올라타서 ‘한반도의 국제분쟁’이라는 또 하나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 김정은 정권의 살길도 열린다. 북한은 어차피 민수경제 발전은 불가능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분쟁의 틈새에서 군수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유리하다.

둘째, 김정은은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것 같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반도의 국제분쟁’을 매개로 트럼프와 이른바 핵군축 협상과 평화협정 빅딜을 해보려는 수작이다. 트럼프 당선 후에는 지난해 바이든이 주도한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정상선언도 약화될 수 있다. 최근 김여정이 ‘기시다 평양방문 가능성’ 운운한 것도 캠프데이비드 선언 균열을 위한 노림수다.

셋째, 윤석열 대통령을 퇴진시키려는 대남 전략의 일환이다. 남한 내 ‘평화냐 전쟁이냐’ 프레임을 만들고 윤석열 정부를 계속 흔들어댈 것이다. 지금 남한 내 정치 상황이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한 면이 있다. 야당 연합과 246개 친북좌파단체의 ‘연합정치시민회의’ 등이 대동단결 스크럼을 짜고 있다. 지하 종북세력부터 온건 중도좌파까지 하나의 공통분모가 ‘윤석열 퇴진’이다.

현재 김정은 정권이 처해진 내외적 상황을 보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기는 어렵다. 또 서해에서 분란을 일으킨다 해도 한미 연합전력이 압도적 우세이기 때문에 북한의 의도를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시점은 북한의 ‘첫 도발’이다. 북한의 ‘첫 도발’ 때 우리가 밀리거나 두려워하게 되면 그 이후 상황은 매우 복잡해질 수 있다.

‘첫 도발’ 때 신원식 국방장관이 세운 즉·강·끝’ 수칙대로 ‘즉시·강력히·끝까지’ 때려잡으면 김정은의 서해 NLL 국제분쟁 수역화 의도는 좌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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