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박재형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미국 법원이 3억6400만 달러(약 4800억 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트럼프와 그의 회사가 자산가치를 허위로 부풀려 신고했다는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벌금과 별도로 그는 형사기소 된 4건의 사건 재판이 다음 달 시작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이후로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항소심에서 법원이 1심과 같이 유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심에 이어 이번에도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도주 우려가 없고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이유에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역시 법원은 혐의가 소명된다면서도 제1야당 대표라는 이유를 들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미국과 한국 모두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앞날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사법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여기에 최근 정치 참여를 선언한 조국 전 장관까지 유권자의 선택 이전에 법원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사실상 두 나라 정치의 향방 결정이 법원 손에 달린 상황이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정치권이 아닌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에 의존하는 ‘정치의 사법화’ 문제는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 이제는 정치적 또는 정책적 결정뿐 아니라 정치인의 운명도 법원이 결정하게 됐다. 정치의 사법화가 더욱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국과 미국 사이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사법의 정치화’ 문제가 일상화되는 모습이다.

사법의 정치화란 법원이나 사법제도가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로부터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인 삼권분립 원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사법의 정치화는 이 원칙을 위반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현상이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정치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으로 들고 가는 정치의 사법화는 일차적으로 정치권 책임이다. 반면 사법부의 판단이 정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은 우선 법원에 있다.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하는 핵심 이유는 법원 판사가 판결에서 정치권과 여론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판사가 법적인 판단만 하지 않고 정치적 영향,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비판 여론 등을 먼저 고려한다.

앞서 언급했던 미국 법원의 재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리고 담당 판사 앞에서 반복적으로 검찰과 법원을 상대로 공격을 이어갔다. 그의 원래 성격에, 자신이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서 가장 당선이 유력한 인물이라는 자신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미국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사건을 맡은 아서 엔고론 판사가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중의 우려와 달리 엔고론 판사에게 정치적 고려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트럼프 측의 정치적 공격은 역효과만 초래해 더 무거운 벌이 선고됐다는 분석이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트럼프 등 피고가 전혀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조국 전 장관이 잘못 인정도 반성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도 방어권을 인정해 준 한국 법원과 다른 모습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 언론에는"판사가 정치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언급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과 한국 법원 사이에는 이러한 정치적 고려, 즉 정치권과 여론의 눈치를 보는가에 차이가 있다. 이 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재명 대표와 조국 전 장관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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