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열
정창열

정부 당국자가 지난 2월 21일 KBS 질의에 "판문점 북측 지역의 통일각 현판이 1월 말쯤 철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주북 러시아 대사관의 최근 SNS에는 기존 ‘통일역’에서 ‘통일’을 지운 채 ‘역’으로만 표시된 평양 지하철 노선도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김정은 지시로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한 바 있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는 ‘지난 1월 19일 촬영된 민간업체 플래닛랩스의 위성사진에서 포착됐던 기념탑이 4일 뒤인 23일 촬영된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며 ‘이 기간 사이에 탑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출판 및 무역 등과 관련된 북한 웹사이트에서도 남북한을 모두 붉게 칠한 한반도 지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등 관련 용어와 이미지 지우기에 나서고 있다. 북한은 지난달 14일 조선중앙TV를 통해 산업 미술을 소개하면서 상표 도안과 관련된 ‘삼천리’라는 회사를 소개했지만, 나흘 뒤에는 인터뷰 배경과 의상에 부착된 ‘삼천리’ 관련 이미지를 모두 삭제했다. 또 북한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북한 애국가 1절에는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부분이 ‘이 세상 아름다운 내 조국’으로 바뀐 사실이 확인된다. 한반도 전체를 상징하는 삼천리라는 가사가 삭제된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행태는 지난해 말 김정은이 대한민국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하고, 지난달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평화통일’과 관련된 용어나 상징물을 쓰지 말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당시 시정연설에서는 ‘삼천리금수강산’과 ‘8천만 겨레’, ‘우리 민족끼리’, ‘동족’ 등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금지 대상으로 적시했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통일부 부대변인은 "북한이 자신들의 애국가에서 5천 년간 민족의 터전인 한반도를 의미하는 삼천리라는 단어를 지우는 식으로 통일 관련 용어조차 없애려고 하는 반민족적 행태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국의 이러한 평가는 다소 미진한 감이 있다.

김정은이 흡수통일·체제통일을 거부하면서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것은, 단순히 반민족적 행태나 대남 협박이 아니다. 김정은의 이번 발언에는 위험하고, 잔혹하고, 특히 교활한 속셈이 자리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5차 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며 "만일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핵 위기 사태에 신속히 대응하고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하여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우리 안보태세에 허점이 발생해 이를 기회삼아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킬 경우, 개전 초부터 핵무기를 사용해 조기에 승리를 거두겠다는 의도이다.

다만 김정은 입장에서 저어되는 것은, 제2의 한국전쟁 성격이 분단 상태에 있는 민족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한 통일전쟁이 되면, 핵무기 사용이 제한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 ‘교전 중인 적대 국가’ 주장과 ‘통일 관련 메시지와 용어’ 삭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사시 핵무기 사용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 유지를 위해 고모부를 잔혹하게 처형하고 이복형을 해외에서 독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결코 상식적 판단에 따라 ‘설마’ 하며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안 된다. 유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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