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한국 사회는 유별나게 서열을 중시하고 비합리적인 권위와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라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상식처럼 통용된다. 특히 1960년대 이전 세대는 대부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저런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왔다. 일종의 죄의식 비슷하다. 자신이 아래 세대에게 가해자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상식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반대되는 정황도 적지 않게 보고 듣고 경험해왔다. 그게 그다지 짧지 않은 필자의 사회생활의 결론이다. 선배한테 대들고 수평적인 질서를 강조하던 친구들일수록 본인이 선배의 자리, 힘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선배들보다 훨씬 더 규율 따지고 권위적으로 구는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요즘 대학가에서 황당한 ‘똥 군기’가 만연하고 있다는 소문도 많이 들었다. 그 내용은 우리 세대의 대학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수준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적지않은 충격을 던진 이강인-손흥민 갈등을 보면서 이런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필자는 축구를 잘 모르고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강인에 대해서는 나름 기대를 갖고 있었다. 축구는 우리나라에서 일종의 국민 스포츠 비슷한 위상을 누리는데다, 과거 ‘천재’로 불리던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강인은 그런 우려를 딛고 세계적인 스타로 발전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를테면 또 하나의 손흥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손흥민과의 다툼이라니? 그것도 선배에게 주먹질? 기가 막혔다.

물론 천재는 존중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비합리적인 권위와 위계질서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가 천재일 수밖에 없다. 천재를 죽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재능이 소모됐을지를 생각해보면 이강인에 대해서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천재란 결과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과로 증명되지 않는 천재는 천재가 아니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에 필요한 재능에는 돌파력, 볼 컨트롤 능력, 패스, 동물적인 슈팅 감각, 경기를 읽는 능력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축구는 전형적인 단체 경기다. 본인이 팀에 녹아들어가는 능력, 팀의 규율이나 분위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중요하다.

이강인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 정말 비합리적인 위계질서가 작동하더라도 일단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래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옭아매는 주변 환경을 자신에 맞게 고치거나. 그 규율이나 위계질서란 게 기껏해야 식사 시간 맞추고 소집에 참석해달라는 정도 아닌가. 길어봐야 몇 주 정도다. 축구 잘한다고 군대도 면제받은 친구가 그 정도도 못 참나? 그것마저 싫다면 아예 국가대표 소집을 거부하든가 했어야지.

이강인 사태는 586 운동권이 보여온 행태의 데자뷰다. 그들은 불합리한 위계질서나 권위를 세대 차원에서 거부한 집단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금 모습은 어떤가. 과거 세대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는가. 이번 총선에서 586운동권 청산론이 적지 않은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도 그들의 그런 행태를 증명해준다.

불합리한 권위나 위계질서가 문제라면 더 합리적인 권위나 위계질서를 세우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586운동권은 권위나 위계질서 그 자체를 거부하고 무너뜨리는 데 주력했다. 586운동권의 이기심이 정상적인 권위나 위계질서를 대체했다. ‘앙팡테리블’ 이강인이나 586운동권을 보면 우리의 강한 위계질서나 권위주의는 한국인들의 못말리는 무질서와 난동에 대한 부득이한 자위 차원의 조치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오죽하면 저런 위계질서라도 만들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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