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국
양일국

국민배우 오현경(1936-2024)이 1일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명문 서울고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드라마 ‘TV손자병법’에서는 위 아래로 치이는 만년과장 역할로 큰 사랑을 받았다. 가정과 생계를 위해 상사의 구박을 견디면서, 뒤에서는 "자식들이 까불고 있어"라고 중얼거리던 이장수 과장은 그 시절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이었다. ‘TV손자병법’은 1993년 10월 그가 계열사 이사로 승진하면서 종영했다.

오현경은 고교시절부터 연극무대에서 이름을 알리다 1964년 동양방송(TBC) 개국과 동시에 탤런트로 특채됐다. 그는 상업방송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내심 부끄럽게 여겼고, 평생 돈 되는 광고는 한 편도 찍지 않았다. 당대 최고 여배우 김지미와 비슷한 출연료를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했는데, 당시 아파트 2-3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현경은 TBC에서 등떠밀려 맡은 연기자협회장을 지내면서 경영진과 싸워 연기자 임금을 30% 인상시켰다. 그 ‘괘씸죄’로 결국 방송에서 하차했다. 이후 사재를 털어 ‘송백당’을 만들어 후배 지도에도 앞장섰다. 배우는 먼저 정확한 발음과 액센트를 구사해야 하며, 마이크 도움 없이도 소극장 정도는 커버할 수 있는 발성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린 시절 그는 당일에 처분하지 못하면 큰 손해를 보는 민어장수가 애타게 손님을 찾는 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만한 절실함을 관객들과 공유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고, 마흔 살이 돼서야 스스로를 배우로 인정했다고 한다. 하늘에서는 암 투병으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시대 진정한 배우이자 선비였던 오현경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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