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국가 간 총성 없는 전쟁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해외 경쟁 기업으로의 기술·인재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공장 내부. /SK하이닉스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국가 간 총성 없는 전쟁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해외 경쟁 기업으로의 기술·인재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공장 내부. /SK하이닉스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가 핵심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면서 이를 둘러싼 반도체업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메모리반도체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개발 붐이 일면서 핵심 반도체인 HBM의 수요가 폭증하는 추세다.

아직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경쟁사들의 기술 추격 속도 역시 만만찮다. 메모리반도체업계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비교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던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5세대 HBM3E를 가장 먼저 양산하며 국내 기업들을 긴장케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SK하이닉스 소속으로 HBM을 연구하던 핵심 인력이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이직해 논란이 되고 있다. 반도체 패권을 두고 국가 간 총성 없는 전쟁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해외 경쟁 기업으로의 기술·인재 유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7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재판장 김상훈)는 지난달 말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이와 함께 위반 시 1일당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가운데 A씨가 SK하이닉스에서 근무하며 얻은 정보가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흘러갈 경우 SK하이닉스의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다.

앞서 A씨는 지난 2022년 7월 SK하이닉스 퇴사 후 2년 내 동종 업체에 취업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어기고 마이크론 임원급으로 이직했다. 퇴사 무렵 A씨는 경쟁 기업에 2년 동안 취업하거나 용역·자문·고문 계약 등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보보호서약서를 작성했다. 전직 금지 경쟁 기업 리스트엔 마이크론이 포함돼 있다.

반도체업계에서는 A씨의 전직 금지 약정이 5개월가량 남은 상황에서 이 같은 가처분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전직 금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경우 가처분이 기각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법원이 HBM 기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단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판부는 결정문을 통해 A씨가 재직 시 담당했던 업무와 지위, 또 업무를 담당하며 알게 됐을 것으로 보이는 SK하이닉스의 영업비밀과 정보, 관련 업계에서의 A씨의 선도적인 위치 등을 종합하면 전직 금지 약정으로써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A씨로 인해 반도체 정보가 유출될 경우 마이크론은 동종 분야에서 SK하이닉스와 동등한 사업 능력을 갖추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는 반면 SK하이닉스는 그에 관한 경쟁력을 상당 부분 훼손당할 것으로 보이는 점, 그리고 원상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한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가처분 명령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해 간접강제를 명할 필요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반도체업계에서는 핵심 기술과 인재의 유출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핵심기술’을 포함한 전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전년보다 3건 증가한 23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절반에 달하는 15건이 반도체 업종에서 발생했다.

지난해 6월에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설계 도면을 빼내 중국에 쌍둥이 공장을 세우려 한 혐의로 전직 삼성전자 임원이 적발되기도 했다. 해당 인물은 ‘메모리반도체 공정의 달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권위자로 알려져 충격이 컸다.

또 삼성전자의 자회사 세메스 전현직 연구원 등은 영업기밀을 이용, 반도체 세정 장비를 수출했다가 적발돼 구속됐다. 반도체 습식 세정장비는 반도체 기판에 패턴을 새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 제거 장비로, 세메스는 이 분야 글로벌 3위를 달리고 있다.

어렵게 키운 반도체 인재가 중국 등 경쟁국으로 넘어가는 사례도 존재한다. 지난해 10월 경찰은 반도체 기술 인력의 대규모 유출 정황을 포착, 이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 컨설팅·헤드헌팅 업체 10여 곳을 압수 수색했다. 중국 등 해외 경쟁 기업으로 넘어간 인력은 삼성전자 110명, SK하이닉스 90명 등 모두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기술 유출 시도는 ‘솜방망이’ 처벌이 주된 원인으로 지적된다. 대법원의 사법연감을 보면 지난 2022년 선고된 영업비밀 해외 유출 범죄의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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