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남정욱

1964년 당시 서독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네 번 울었다. 서독 대통령과 쭉 뻗은 아우토반을 달렸을 때 구불구불 편도 1차선 도로뿐인 조국의 현실이 서러워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 도로 양옆으로 펼쳐지는 울창한 숲을 보고 또 눈물을 떨궜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눈물 잔치를 한 일은 유명하다.

네 번째 눈물은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유지인 하네다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영일만 위를 지날 때 박정희는 조금 전 지나온 일본의 푸른 숲과 달리 사막 같은 한국의 산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눈물은 많이 안다. 그러나 두 번째와 네 번째 눈물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반도 남쪽의 산을 지금처럼 푸르게 만든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 의미와 중요성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설마 대통령이 독일과 일본의 숲에 미관상 아름답다는 이유로 감동해서 울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진 산림녹화는 보기 좋으라고 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물 부족 국가였다. 내리는 비는 많았지만 유용한 비가 아니라 집과 전답을 쓸어가는 미운 비였다. 서울의 경우 집집마다 수도꼭지는 있었다. 저지대는 제 기능을 했지만 고지대에서는 거의 관상용이었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비는 잘도 오시는데 왜 물은 귀했을까.

물 관리는 보관과 정수가 핵심이고 당연히 정수보다 보관이 먼저다. 물 보관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댐이다. 저수 시설의 규모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이다. 다른 하나는 숲이다. 아무리 큰 강도 발원지를 찾아가면 그 시작은 깊은 산속 작은 샘이다. 댐의 저수 용량과 산의 저수 용량,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산에 저장되는 물의 양은 180억 톤이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의 총량은 140억 톤이다. 나무들이 붙들어놓고 있는 물의 양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숲과 물은 같은 의미이고 치산치수는 국가 행정의 출발이다.

박정희는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쿠데타 다음 달 ‘임산물 단속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입산금지 조치 강화가 핵심이었다. 그 해 12월에는 산림법을 제정했다. 산림과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법률이다. 박정희 이전이라고 숲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 18세기 조선에서도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금산(禁山 ) 정책을 시행했고 정부 주도의 나무 심기 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가정용 연료에서 차지하는 목재 비중이 80%에 달하는 나라에서 이는 애초부터 답이 안 나오는 정책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지 말라는 얘기는 겨울에 얼어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이승만 정부도 산림녹화에 공을 들였다. 식목일을 제정하고 나무 심기 행사도 벌였지만 적극적이지 못했다. 식목일 연설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 빨리 금수강산의 옛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의지는 없고 그냥 희망사항이었다. 박정희는 도벌(盜伐)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산림녹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박정희가 식목만큼 서둘렀던 것이 석탄 개발이다. 예산 일부는 식목 지원 자금에서 가져다 썼다. 오용(誤用)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난방부터 해결해야 있던 나무마저 땔감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며 밀어붙였다. 나무 심기를 하는 동안에는 ‘경쟁과 감시’를 붙였다. 공무원들에게 식목 수량을 할당했고 여기에 인센티브와 승진 심사 점수를 연동했다. 식목 검사는 타 지방 지자체끼리 시켰다.

치밀한 행정에 더해진, ‘명령은 5%, 감독과 확인은 95%’라는 평소 박정희 스타일은 결국 국토의 64%가 산인 나라의 풍경을 파랗게 바꿔놓았다. 오는 식목일에는 가족과 함께 가까운 산에 오르자. 그리고 풍요로운 삶과 금수강산의 옛 모습을 찾아준 그 공로에 감사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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