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남정욱

김대중은 말을 품위있게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김영삼은 품위는 없었지만 쉽고 머리에 박히는 말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70년대와 80년대 우리는 그래도 정치에서 수사학이라는 걸 구경하면서 살았다.

언어가 정치인의 무기라는 것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이자 하나의 공식이다. "정직이 없다면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좋아하는 키케로(로마시대 정치가·철학자)의 어록이다. 키케로의 언어들은 듣는 사람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그래서 언어는, 말은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우리 정치에서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부터다. 말을 침 뱉듯이 하는 그의 스타일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한 언론인이 노무현을 평한 "역사의식은 뒤틀렸고 오만은 헌법을 넘었고 지식은 짧았으며 혀는 너무 빨랐다"라는 표현은 정확했다.

빠르다는 것은 순발력이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말에 대한 숙고가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4000만 명이 지켜보는 방송에서 태연히 이런 발언을 했다.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특정인을 찍어 노골적으로 빈정거린 이 발언은 머리 조아리고 돈 준 사람을 한강 다리로 내몰았다.

대통령의 말은 무게가 다르다. 대통령의 말을 걱정 없이 짊어질 일반인은 없다. 노무현은 말로 살인을 했다. 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적개심은 숙고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단어의 구사와 표현도 심란했다. "못 해먹겠다", "깽판" 같은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상상을 해보라. 김대중의 입에서 못 해먹겠다, 깽판 따위의 말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아마 안 될 것이다. 노무현은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발언을 자주 했지만 정작 그가 맞춘 것은 시정잡배들과의 입 높이였다.

노무현보다 말을 더 경박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뛰어넘은 인물이 있다. 이재명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는 상당한 수준의 실력 발휘를 한 적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수위를 몇 단계 높인 이재명의 ‘형수 특정 부위’ 발언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적인 영역이다.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공사 분리는 해야 한다.

지난 3월 8일 이재명은 선거운동을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이런 자리에서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 식당에 온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온 거지 유세 연설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 그런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폭력이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밥맛 술맛 다 떨어지게 하는 만행이다. 해서 반갑다는 표정으로 인사만 하고 소주병 있는 테이블이면 한 잔 따라주고 끝내는 것이 예의이고 품위다.

그런데 기어이 사고를 쳤다. 젊은 남자 손님을 향해 "1번 이재명"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더니 "설마 2찍, 2찍 아니겠지?"라고 묻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2찍’은 지난 대선에서 기호 2번을 찍은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일상 언어도 아니고 국민의힘 반대 강성 커뮤니티에서나 사용하는 말이다. 남자 손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그가 혹시 2번을 찍은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알고 있어도 자제해야 하는 말과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재명에게는 그 한계가 없다. 그에게는 ‘내 부하’(‘내 편’이 아니다)와 적들만 존재한다. 상대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존중이라는 개념이 애초부터 없으니 태연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언어를 거칠게 만들었고 이재명은 그 한계를 돌파했다. 이재명은 말을 경박하게 하는 것에 천하게, 야비하게 하는 스킬을 덧붙였다. 잡배 수준의 말은 이제 깡패의 언어로 한 차원 더 내려앉았다. 김대중이 2찍 발언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려다 멈췄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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