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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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이윤경 작곡가의 낭독-음악극 ‘고독하지만 연대하는’(SoliTaire et SoliDaire)을 관람했다. 꽤 오래 전이었지만, 아직도 공연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문학, 음악 그리고 연출 때문이다.

먼저 낭독-음악극 ‘고독하지만 연대하는’은 알베르 카뮈가 1947년에 발표한 소설 <페스트>(La Peste)를 음화(音化)했다. 카뮈의 <페스트>는 코로나 때문에 재조명을 받은 소설이지만, 팬데믹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빛을 전혀 잃지 않을 불멸의 문학작품이다. 그런데 공연에 인용된 카뮈의 문장은 널리 알려진 유명 문장도, 내용을 요약하는 핵심 문장도 아니었다. 작곡가 이윤경은 ‘과거의 허구’인 <페스트>에서 ‘현재의 역사’인 코로나가 공명하는 문장을 포착했다. 그리고 공연의 내레이터까지 겸한 작곡가는 문학의 텍스트 사이를 다섯 울림으로 채워 넣었다.

음악은 5악장의 베이스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베이스 클라리네티스트 김욱이 협연했고, 바이올린 둘·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플룻·피아노·타악기 그리고 바리톤으로 구성된 ‘316앙상블’이 함께 했다. 소설의 흐름 순으로 구성된 악장들의 부제는 1악장 ‘무심한 도시 오랑-페스트와 존재의 감옥’, 2악장 ‘그리움과 도피-초월적 신앙, 실존적 반항’, 3악장 ‘혼란과 이별-죽음을 실은 열차’, 4악장 ‘죄 없는 자의 죽음-절정에서 후퇴로’, 5악장 ‘결정적인 패배-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해방’이다.

협연인 베이스 클라리넷이 음악의 주연이었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리유나 타루 역을 맡진 않는다. 묵직한 저음을 날렵하게 연주할 수 있는 베이스 클라리넷은 앙상블 속에서 속절없이 방황하고 끊임없이 반항한다. 침몰하는 저음부터 몸부림치는 고음까지 넓은 음역을 넘나들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그 목적지가 실존일지, 부조리일지, 반항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으며 그 안으로 내던져진 존재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현대 음악의 움직임은 소설의 철학적 전개와 섬뜩하게 공명한다. 이 운동 함수는 고차 방정식처럼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공연 제목에 해제가 있다. 이윤경의 음악은 ‘고독하지만 연대한다.’ 바로 작곡가가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톺아낸 주제(subject)다.

공연의 흐름은 한 악장이 끝나면 음악의 여백을 텍스트가 메우고, 낭독이 비운 자리를 음악이 채우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비움과 채움의 반복인데, 이 연출 역시 고독(비움)과 연대(채움)와 같은 파동을 갖는다. 하지만 현대 음악 작품이 갖는 낯섦과 난해함 때문에 음악과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힘들다.

이에 이윤경은 간단한 소품을 활용해 무대적 연출을 시도했다. 각 악장과 낭독이 끝날 때마다 무대 위의 붉은색 소품이 하나씩 늘어난다. 처음에는 무대 중앙에서 연주하는 협연자의 붉은색 상의, 내레이터의 붉은 신발 그리고 드럼 세트의 붉은색 북이 전부다. 그러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붉은 스카프, 타악기 주자의 빨간 모자, 비올라 주자 발치의 붉은 쇼핑백이 추가된다. 이 붉음은 고독한 희생이 흘린 피이자 연대한 생명의 힘을 상징한다. 자칫 지루할 수 있고 또 난해할 수 있는 낭독-음악극에서 관객의 집중을 유도함과 동시에, 주제를 선명하게 내세운 고명 같은 연출이었다.

초연이었던 2022년 팬데믹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모두가 고독했고, 채움은 요원했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제시한 ‘고독과 연대’ 그리고 ‘비움과 채움’이 제시한 방향은 뚜렷했다. 음악과 낭독의 울림은 ‘과거의 허구’인 페스트와 ‘현재의 역사’인 코로나를 관통해 ‘미래의 실존’으로 퍼져나갔다. 문학 해석과 현대 음악 작곡 그리고 무대 연출까지 고독하게 소화해 낸 이윤경은 316앙상블, 관객과 연대하여 짜임새 있는 공연 ‘고독하지만 연대하는’을 만들어냈다.

오는 4월 26일 이윤경은 화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내 생애 아름다운 91페이지’라는 음악극을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올릴 예정이다. 총체예술가인 이윤경이 미술을 어떻게 음악과 극으로 만들어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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