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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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연극의 설계도다. 설계도가 없으면 건물을 짓지 못하듯, 희곡이 없으면 연극을 만들 수 없다.

설계도가 수많은 선과 숫자로 이루어져 있듯, 희곡은 대사와 지문으로 구성된다. 선과 숫자, 둘 중 하나가 없다면 건축물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지문만 가득한 희곡은 그 어떤 연극보다도 아름다운 공연이 될 수 있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이다.

코로나의 복판이었던 2021년 8월, 연출가 김아라는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야외무대에 이 공연을 올렸다. 특이하게도 무대에 의자를 놓아 관객석으로 쓰고, 관객석을 거대한 무대로 삼았다. 베테랑 배우 정동환을 비롯한 총 스무 명의 배우가 4백여 명의 극중 인물을 소화한다. 대충만 따져도 1인 20역 정도다. 대사도 없지만 내용도 없다. 수많은 인물이 광장을 돌아다닐 뿐이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해 무대 위에 잠시 존재했다가 슬그머니 퇴장한다. 무대 위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인물은 정동환이 맡은 노숙인 역이다. 무표정한 그는 광장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헤드폰을 끼고 운동하는 사람,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 소방 호스를 둘러멘 사람, 출근하는 회사원, 무거운 짐을 나르는 사람 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상이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소통이 차단된 시기였다. 연극은 대사가 없기에 소통이 부재했지만, 군상과 광장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관객들의 눈빛은 소통을 갈구했다. 이쯤 되면 깨닫게 된다. 관객석과 무대를 뒤바꾼 김아라 연출의 의도는 소통의 상위 개념이다. 관객석에서 연기하는 무언의 배우들과 무대 위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침묵의 관객 사이에 경계는 없다. 관객과 배우, 소통과 불통을 더 큰 개념인 ‘존재’와 ‘시간’으로 포용한 미학이었다. 언어는 소통의 한 수단일 뿐이다.

2023년 4월, 김아라 연출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리움미술관에 같은 연극을 올렸다. 이번에는 배우 박정자가 노숙인 역을 맡았다.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관객석과 무대를 뒤바꿨다면, 이번에는 아예 이 두 공간의 경계를 없애 버렸다. 배우들이 슬쩍 관람객 사이에 끼어들기 때문에 공연이 언제 시작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던 침묵의 배우들은 이제 전시장을 돌아다닌다. 배우들과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 그리고 카텔란의 실제 사람 같은 마네킹 작품들이 뒤엉킨다. 상암동 공연보다 산만할 수밖에 없지만, 이 산만이 군상의 실재였다.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그리고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항상 집중할 수는 없지 않은가?

관객과 배우 사이, 배우와 카텔란의 작품 사이 그리고 작품과 관객 사이. 이 세 사이는 연결되어 있지만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아라 연출은 연극에 미술을 결합하면서, 군상과 존재 그리고 소통의 상위 개념을 스스로 확대했다. 그 팽창 과정에서 고루한 경계가 무너졌고, 그 선이 사라진 자리로 아스라이 드러나는 연결을 감지했다. 그 연결은 소통의 다른 면모였을까?

"의사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호 합의만 있을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자신의 저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 한 말이다. 소통은 언어라는 감옥에 장기 수감 중이다. 극작가 한트케는 희곡의 침묵으로 소통의 석방을 요구했고, 연출가 김아라는 배우와 관객 그리고 미술작품을 동원해 감옥의 담을 걷어냈다.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의 시제는 과거인가, 진행형인가? 소통 없는 침묵 속에서 진정한 소통에 관해 철학 하는 시간이었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소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또 다른 방식의 연결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 연결의 가능성을 전달하기 위해 한트케와 김아라는 긴 침묵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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