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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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교내 합창대회가 열렸다. 우리 반이 선택한 노래는 <과수원길>,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로 시작하는 그 노래 말이다. 이 노래를 모르는 학생은 없었기에, 연습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회를 며칠 앞뒀을 때, 담임선생님은 음악선생님을 초청해 마지막 점검을 부탁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 짜내서 노래를 불렀지만, 음악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이건 합창이 아니야. 파트를 나눠 부르고, 그게 합쳐진 게 합창이지." 하지만 우리들 중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대회에서 우리는 예선 탈락했다. 정확한 순위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가 꼴등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반은 최소한 ‘합창’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서야 난 음악선생님이 했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인원을 나눠서 서로 다른 파트를 부르게 하면 그 소리들이 하나로 합쳐져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게 바로 합창이었다. 대회 날 우리가 부른 "과수원길~"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소음에 불과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민주주의의 기본도 사실 합창이다. 한 사안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 민주주의는 그중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선택하고, 다른 의견을 선택한 이들을 설득해 내는 시스템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방안의 장점을 취함으로써 보다 좋은 안을 도출해 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에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설령 자기가 미는 정책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불만을 갖는 대신 이를 따르게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하지만 지난 5년간 더불어민주당은 합창을 하는 대신, 다른 목소리를 철저히 배격한 채 한 가지 목소리만 냈다.

예컨대 민주당이 공수처를 밀어붙이던 때, 금태섭 의원은 당론을 거부하고 민주당 내에서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다. 금 의원은 이전부터 공수처를 반대해 왔기에, 그의 기권은 당론과 양심 사이의 고뇌에서 나온 결단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금 의원은 이후 공천에서 탈락했고,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뒤에는 당 윤리심판원으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는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하나의 헌법기관, 그런데도 민주당은 금 의원이 소신에 따라 투표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린 것이다.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금 의원의 휴대폰으로 수만 통의 문자폭탄을 보냈는데, 그 대부분이 당에서 나가라는 내용이었다.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는 지금의 공수처를 보면 금 의원의 반대가 타당해 보이는데 말이다. 당내에서도 이럴진대 야당과의 협치는 사치였다.

민주당이 180석을 차지한 2020년 4월 이후, 그들은 야당의 의견은 무시한 채 수많은 악법들을 통과시켜 버린다. 당명만 ‘민주당’이지, 공산주의 일당독재와 다를 게 없었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했다가 정권을 내줬고, 이는 결국 노대통령을 잃는 사태로 귀결됐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마저 잃을 수 없다,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하지만 노대통령 이후 민주당이 정권을 빼앗긴 건 그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지, 노통에 대한 비판에 대응 못 해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정권 들어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대깨문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문통을 옹호했지만, 이번에도 정권을 빼앗겼지 않은가? 오히려 문통의 명백한 잘못마저 잘한 일이라 우겨댄 것은 ‘민주당은 잘못해도 사과를 안 한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민심을 이반시켰다.

여기에 대한 반성 대신 예전 관성에 젖어 새 정권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민주당에게 미래는 없다. 이 교훈은 새로 집권한 ‘국민의 힘’에게도 적용된다. 만일 국민의 힘이 대통령 윤석열을 절대시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려 한다? 이건 합창대회에 나가 <과수원길>을 부르는 것과 같고, 그 결과는 예선 탈락이다. 부디 다양한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멋진 음악이 탄생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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