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금의환국(錦衣還國)

선교사들 모두 귀국 권고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
서울 YMCA ‘한국인 총무’ 제안
1910년대 YMCA, 독립협회 축소판
청년들 호응 큰 인기 강사 이승만
‘105인 사건’으로 또 다시 미국행

류석춘
류석춘

1910년 718일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은 날로부터 한 달을 조금 넘긴 829일 대한제국은 마침내 지도에서 사라졌다. 일본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예상된 일이긴 했지만, 막상 당하고 나면 막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대학원 재학 때부터 이승만은 박사를 마친 후의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추천서를 써준 서울의 선교사들은 모두 이승만이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게일 (Gale)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고 (1908 3 12 7 22 편지), 언더우드(Underwood) 는 곧 창립될 연희전문의 전신 연합기독대학’ (Union Christian College) 교수로 일할 것을 권고했다 (1910 2 16 편지).

1912년 서울 YMCA 간부들 및 학생회 대표들 사진. 맨 뒤 YMCA 총무 질렛(Phillip L Gillet)이고, 그 바로 아래가 이승만이다. 맨 앞 가운데 인물은 회우부(會友部) 간사 김일선이고, 그의 오른쪽이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협동총무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1912년 서울 YMCA 간부들 및 학생회 대표들 사진. 맨 뒤 YMCA 총무 질렛(Phillip L Gillet)이고, 그 바로 아래가 이승만이다. 맨 앞 가운데 인물은 회우부(會友部) 간사 김일선이고, 그의 오른쪽이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협동총무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최종 결심을 위해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19103월 뉴욕에 있는 ‘YMCA 국제위원회를 찾아가 모트 (John Mott, 1865~1955, 목덕 穆德: 기독교청년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46년 노벨평화상 수상) 총무와 의논했다. 모트 역시 이승만에게 서울 YMCA에서 일할 것을 추천했다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중앙일보사, 1996: 70).

모트의 연락을 받은 서울 YMCA 총무 질레트 (Phillip L. Gillet) 1910523일 자로 이승만에게 취업 초청장을 보냈다. 이승만을 서울 YMCA ‘한국인 총무’ (Chief Korean Secretary) 로 기용하고 상당한 월급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승만이 이 제안을 수락하는 답장을 보낸 날짜는 박사학위를 받은 바로 다음 날인 1910719일이었다.

서울 YMCA 일자리를 맡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가장 신경 쓴 문제는 일본 식민지 권력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품고 일본의 대한 침략을 미국이 막도록 요청하고, 마침내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나 러일전쟁 강화회의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영익은 이승만이 1910413일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쓴 편지를 인용하며 이승만의 우려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유영익, 1996: 74). “자신의 일거일동에 대한 일제 당국의 경계와 감시야말로 가장 우려되는 ... YMCA 에 일자리를 잡는 경우 자기의 비타협적 성격 때문에 일본인들과의 마찰이 불가피 ...”

그럼에도 이승만은 한일합병 조약이 발표된 날로부터 4일이 지난 191093일 뉴욕에서 영국 리버풀로 가는 발틱 (S. S. Baltic) 호를 타고 귀국의 첫발을 내디뎠다.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둘러 본 다음 이승만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만주 땅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그를 실은 열차는 마침내 19101010일 저녁 8시 서울역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떠난 지 511개월 만에 신학문의 챔피언이 되어 귀국한 이승만은 바로 서울 YMCA 일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유영익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승만이 돌아온 1910년대 YMCA 는 이승만의 옥중 동지들과 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개화 지식인들이 한데 모인 10여 년 전 독립협회의 축소판이었다...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와 브로크만 (Frank M. Brokeman) 이 각각 총무협동총무를 맡고 있었고 그 아래에 몇 년 전 이승만의 영향으로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등이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윤치호, 김규식, 김린 등과 손잡고 ... 기독교 청년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유영익, 1996: 80).

서울 YMCA에서 같이 일하게 된 옥중 동지들과 귀국 직후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정식, 안국선, 이상대, 이원긍, 김린, 이승만이다.
서울 YMCA에서 같이 일하게 된 옥중 동지들과 귀국 직후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정식, 안국선, 이상대, 이원긍, 김린, 이승만이다.

한국인 총무이승만은 학감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의 교육과 청년운동을 총괄적으로 지도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설교하고 또 성경연구를 인도함은 물론 강의와 강연을 통해서 전국적 YMCA 네트워크 구축도 주도했다.

1911년 봄부터 여름까지 이승만은 브로크만과 함께 전국 순회전도에 나섰다. 순회전도의 마지막 일정은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 (韓英書院) 에서 개최된 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 참석이었다. 이 행사는 한 해 전 모임의 두 배에 달하는 백 명 가까운 인원이 참석한 성황이었다.

1911년 6월 기독학생 하령회가 열렸던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앞줄 중앙의 어린이 뒤가 이승만이다.
1911년 6월 기독학생 하령회가 열렸던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院). 앞줄 중앙의 어린이 뒤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인기 강사였다. 그의 강연을 들은 학생 중에는 훗날 외무장관이 된 임병직, 공화당 의장이 된 정구영,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된 이원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영익, 1996: 82).

바쁜 와중에도 이승만은 미국 유학 시절 다짐했던 기독교 교육을 위한 기초작업인 번역 일에도 매진했다.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가 청년 학생들 선교를 위해 저술한 매뉴얼 3권을 1911년 번역해 출판했다.

1911년(명치 44년) 서울 YMCA(황성기독청년회)가 청년학생선교를 위해 발행한 책자들. YMCA 국제위원회 총무 John Mott(穆德)가 쓴 책들로 이승만이 번역했다. 왼쪽부터 '신입학생인도'(Work for New Students), '학생청년회회장'(The President of the Student), '학생청년회의종교상회합'(Religious Department of the Student Association)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1911년(명치 44년) 서울 YMCA(황성기독청년회)가 청년학생선교를 위해 발행한 책자들. YMCA 국제위원회 총무 John Mott(穆德)가 쓴 책들로 이승만이 번역했다. 왼쪽부터 '신입학생인도'(Work for New Students), '학생청년회회장'(The President of the Student), '학생청년회의종교상회합'(Religious Department of the Student Association)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그러나 이 시기 이승만은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했다. 낙산 중턱 창신동에 살고 있던 아버지와 박씨 부인은 이승만의 아들 봉수가 1906년 미국에서 객사하고 나서부터 견원지간으로 다투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정 내 불화를 견디다 못한 이승만은 1910년 겨울 창신동 집을 뛰쳐나가 종로에 있던 YMCA 건물 3층 다락방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121월에는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조혜자, “인간 이승만의 새 전기여성중앙19834월호, pp. 360-363; 유영익 1996: 78).

이혼의 아픔을 겪은 이승만은 오히려 일에 더욱 몰두하며 아픔을 잊고자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한국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해 기독교 지도자들을 전국적으로 검거해 결국 105명이 실형을 받은 사건을 일컫는다. YMCA 전국 조직망 건설을 담당하던 이승만이 이를 비켜 갈 방법은 없었다.

합방후 한국의 모든 정치·사회 단체를 강제로 폐쇄시키는데 성공한 총독부였지만 YMCA 만은 그 국제적 유대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윤치호·이승만 등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인사들의 영향으로 한국 학생들의 YMCA 운동이 활성화되자 총독부는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마침내 윤치호가 이 사건의 주모자로 191224일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다음 차례가 본인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승만은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인 모트 총무의 개입으로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미국 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상당한 말썽이 빚어질 것이란 모트의 경고가 먹혔기 때문이다 (Oliver, 1954: 118).

때마침 감리교회가 4년마다 개최하는 정기총회가 19125월 미국 미니아폴리스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국의 감리교 목회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이승만을 한국 감리교 평신도 대표로 선출하고 이 회의에 파견하는 형식으로 이승만을 도피시킬 수 있었다. 191232637살 이승만은 다시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서울에 돌아온 지 1년 반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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