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찬
이범찬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정부 시작 11일밖에 안된 시점에 초스피드로 방한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가장 단기간에 미국의 대통령이 방한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다. 통상 새 정부의 한미정상간 회담은 우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바이든 대통령은 급하게 그리고 2박3일간 방한할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대통령이 먼저 한국을 방문한 것은 딱 두 번밖에 없다. 바로 미국의 사활적 국가이익(vital interest)이 걸려 있을 때였다.

첫 번째가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서부전선 최전방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전황을 정확히 파악해 전쟁을 지속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방한한 것이다. 방한 후 그는 공약대로 전쟁을 종결키로 하고 정전협정에 몰두했다.

두 번째는 북한의 NPT 탈퇴(1993.3.12)로 1차 북핵위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먼저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핵위기 해결방안의 하나로 영변 핵시설을 외과수술식 공격(surgical strike)으로 파괴하는 등의 북핵 해결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외에도 미국 대통령은 자국의 사활적 국가이익이 걸려 있을 때 방한해 정상회담을 함으로써 한반도 안보지형에 심대한 영향을 줬다. 존슨 대통령(1966년 3월)이 베트남전쟁의 격랑 속에 방한해 한국군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아 내에서 공산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1979년 7월에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거론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다. 카터는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미군 철수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박정희 정부로서는,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 철수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45분간 고성이 오가는 강한 설득을 했고, 엄중한 한반도 안보상황에 대한 미 의회의 반발로 주한미군 철수 결정은 없던 것으로 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바이든 대통령의 신속한 방한도 미국의 사활적 국익이 걸려 있는 북핵대응 방안과 대중국 포위 및 견제전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완료하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거의 완성했다. 이로써 이제 김정은의 비핵화 가능성을 전제로 한 비핵화 회담을 접고, 동북아의 전략적 핵균형 회복방안을 제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한국·일본·대만 그리고 호주를 묶어 NATO식 핵공유 방안을 제안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미국이 이런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면 반드시 반대급부도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 및 포위전략의 일환인 쿼드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가입 요청 등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동반자로서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 미중 패권경쟁이 가속화되고 안보와 경제가 분리할 수 없는 경제안보가 부각되는 상황 아래서,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기대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국이 자위적 핵균형을 만들어 준다면 안미경중이 아니라 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로 아니 경제도 미국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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