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② 차별철폐와 복음 

백정 박성춘, 아들의 출세 위해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보내
왕의 주치의, 백정을 치료...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 자녀로

복음이 바꿔놓은 삶...왕손과 백정이 한 교회의 장로가 되다 
백정의 아들 박서양, 세브란스 최초의 의사 돼...양반과 결혼

‘하나님 앞에 차별 없다’는 복음, 조선 사회 근본부터 흔들어
선교사 통해 전해진 복음, 500년간 꿈쩍 않던 조선을 깨우다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만민공동회 장면. 백성 박성춘은 차별철폐를 위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했다. 
만민공동회 장면. 백성 박성춘은 차별철폐를 위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했다. 

차별은 어느 시대나 국가를 막론하고 늘 있었다. 역사상 처음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도,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가 백인들의 차별을 뚫고 대통령에 당선된 남아공에도 법이나 제도상으로 차별이 사라졌지만, 관행 혹은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차별은 끈질기게 남아공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인도에서도 고질적인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유럽에서도 인종과 민족에 대한 편견이 아직까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지금부터 약 140여년 전인 조선 후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장 부당한 차별을 받았을까. 바로 백정들이다. 백정은 흰 백(白)자에 장정 정(丁)자로, 원래 중국에서는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천한 사람의 대명사로 변질됐다. 조선 후기까지 백정들은 같은 마을에서도 외딴 곳에 살거나 따로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입는 옷이나 망건 같은 것들도 착용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시 백정이 일반인처럼 행세하면 어떻게 됐을까. 순조 9년인 1809년, 당시 개성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백정이 혼례식을 치르면서 ‘감히’ 두루마기와 갓을 썼는데 그것을 본 개성 사람들이 달려와 그 백성 집을 부수고 갓을 빌려준 사람까지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관아 앞까지 몰려가 돌을 던지며 백정을 처벌해 달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백정처럼 지독하게 차별을 받는 부류는 없었다. 그들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4년에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당시 김홍집 내각은 정치·경제·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갑오개혁)을 단행해 신분제를 포함한 각종 폐습 타파에 나섰다. 이때 신분제가 철폐됨에 따라 백정에 대한 차별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현실은 제도만큼 빨리 바뀌지는 않았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백정을 차별하는 냉혹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 한 백정을 통해 좀처럼 꿈틀거리지 않던 조선의 낡고 오래된 차별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만은 신식 학문을 배워서 꼭 출세해라” 백정 아버지 박성춘의 꿈

조선 후기 전주의 한 백정 가정의 모습.
조선 후기 전주의 한 백정 가정의 모습.

백정 박성춘. 그는 1862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관훈동인 관자골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일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백정의 딸을 만나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박봉출. 아버지 박성춘은 아들 박봉출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백정 신세를 면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을지로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곤골당 예수교학당이었다.

이 학당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893년 6월에 세운 학당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회 안에 세운 일종의 초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는 서양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컸던 때였음에도 박성춘은 아들 박봉출을 여기에 입학시켰다. “너만은 신식 학문을 배워서 꼭 출세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써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학교나 병원을 세운 것은 교육과 치료를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이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곤당골 예수교학당도 교회 안에 세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학당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교회 예배에 참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성춘은 아들의 주일예배 참석 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신식 학문을 배워 출세하면 그만이지 ‘서양 귀신’에게 아들을 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1984년에 청일전쟁과 동학혁명이 동시에 일어나 순식간에 조선을 휩쓸며 엄청난 희생이 일어나는데, 이 해에 극심한 콜레라까지 창궐해 조선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서울에서만 하루에 300여 명이 죽어 성문 밖으로 실려 나갔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명에 불과했으니 상당한 인명 피해였다. 이때 박성춘도 콜레라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지금은 콜레라는 예방접종 하나로 간단히 막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콜레라를 귀신이 가져다 주는 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콜레라에 걸리면 병원이 아니라 무당부터 찾아 푸닥거리를 하곤 했다. 물론 병원도 없었다. 콜레라에 감염된 박성춘도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 

◇왕의 주치의, 백정을 치료하다...‘천한’ 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였던 에비슨 선교사. /연합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였던 에비슨 선교사. /연합

바로 그때 박성춘 앞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와 의사 에비슨이 나타났다. 무어 선교사는 곤당골 예수교회당을 만들어 운영하는 사람이었고, 에비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서양인 두 명이, 그것도 왕의 주치의가 직접 왕진 가방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두 서양인은 박성춘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말을 걸어왔다. 조선의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손을 잡아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박성춘은 이들이 행동에 아마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전하는 예수님이라면 믿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결국 박성춘은 콜레라에서 완치됐고, 아들 봉출의 예배 참석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들도 에비슨이 막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기로 약속했다. 박성춘 자신도 무어 선교사가 인도하는 곤골당교회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95년, 박성춘은 세례를 받고 ‘천하디 천한’ 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교회 출석과 세례를 놓고 교회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곤골당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20여 명은 대부분 조선 사회의 고위직 양반들이었는데, 그들이 박성춘의 교회 출석을 문제 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감히 백정 놈이?’ 이런 심보였을 것이다. 당시엔 양반과 백정의 신분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인사동 곤골당 교회(현 승동교회, 1983년 창립).
인사동 곤골당 교회(현 승동교회, 1983년 창립).

고위직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한다. “박성춘이 교회를 나오지 못하도록 하시오. 안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 안 나올 것이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그런 양반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물리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박성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들과 똑같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다시 제안한다. “그렇다면 좋소. 박성춘이 교회에는 나오되 같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소. 양반 자리, 백정 자리를 따로 구분해서 앉게 해주시오.”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현실적인 제안 앞에서 무어 선교사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이내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는데, 왜 구분을 지으려 하십니까?”라며 또 다시 거절한다. 그러자 결국 양반 교인들은 곤당골교회를 나가서 ‘홍문수골교회’라는 교회를 따로 세웠다. 

분립이후 곤당골교회는 박성춘의 열정적인 전도로 많은 백정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됐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천한 백정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무어 선교사에게 큰 감동을 받은 박성춘은 수원, 평택, 양주, 포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백정들을 전도했다. 그 결과 수원을 비롯한 전국에 수십개의 백정 교회가 세워진다. 

그러던 중 곤당골교회는 1898년 뜻밖의 화재를 당한다. 그러자 나름대로 자립 기반을 갖추며 성장을 거듭해 가던 홍문수골교회가 곤당골교회에 도움을 손길을 내민다. 그러자 곤당골교회 교인들은 그대로 장소를 옮겨 홍문수골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 예배를 드리게 됐다. 결국 두 교회는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있는 ‘승동교회’로 태어나게 됐다. 

◇복음이 바꿔놓은 백정의 삶...왕손과 백정이 나란히 한 교회의 장로가 되다  

백정 박성춘은 1985년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했다. 그러자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그해 5월13일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칙령을 다시 한 번 선포한다. /KBS 영상 캡처
백정 박성춘은 1985년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했다. 그러자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그해 5월13일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칙령을 다시 한 번 선포한다. /KBS 영상 캡처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접한 박성춘의 변화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장로가 되거나 교회 안팎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존귀하고 평등하다’라는 깨달음은 자신과 같은 백정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조선 사회 자체를 바꿔야겠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1911년 승동교회에서 장로 선거가 있었다. 당시 장로의 자격은 만 30세 이상으로 세례를 받은 지 1년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교인 3분의 2가 찬성해야 했다. 지금으로서도 쉽지 않은 기준인데, 승동교회에서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이 양반과 상민, 백정들이 다니는 승동교회의 초대 장로가 됐던 것이다. 그는 이후 노회에서 임원을 맡아 교회안팎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

박성춘이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된 지 3년이 지나서 또 하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흥선대원군의 친척이자 왕손인 이재형이 승동교회의 장로로 뽑힌 것이다. 백정과 왕손이 나란히 한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갑오개혁으로 명목상 신분 차별이 철폐됐지만, 일상 속 차별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박성춘은 마침내 직접 나선다. 그는 1985년 4월 무어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한 것이다. 그러자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이런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그해 5월13일에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의 칙령을 다시 한 번 선포한다.

그러자 백정들이 기븜에 겨운 나머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종로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조선왕조 500년만에 드디어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는 감격이 그들을 휩쌌다. 박성춘은 한동안 도포와 갓을 벗지 않은 채 잠을 잘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고 한다. 박성춘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해 11월과 이듬해 3월, 또 다시 탄원서를 올린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백정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정의 아들이 세브란스 최초의 의사가 되다...양반 가문 딸과 결혼도

1. 박서양을 포함한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들의 사진.  2. 에비슨 선교사와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한국인 의사 중 하나였던 박서양이 함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우측이 에비슨, 가운데가 박서양.
1. 박서양을 포함한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들의 사진.  2. 에비슨 선교사와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한국인 의사 중 하나였던 박서양이 함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우측이 에비슨, 가운데가 박서양.

이런 활동들을 통해 박성춘의 이름은 천민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양반들 사이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은 연설도 하게 된다. 신분 차별 철폐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를 독립협회에서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시민대표로 만민공동회에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이 사람은 바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천막)에 비유하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도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하나의 장대가 아닌 여러 장대가 천막을 받치듯이,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이 국가를 떠받치는 기둥이 될 때 국가의 힘은 더욱 공고해진다는 내용의 명 연설이었다. 이후 박성춘은 한동안 은행 관련 일을 하다가 1933년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한편 백정 박성춘의 아들로 태어난 박봉출의 삶도 원래는 평생 백정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느 백정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갔다. 이름도 봉출에서 ‘서양’으로 바꾼 박서양은 1987년 양반 가문의 딸인 경주 이씨와 결혼한다. 이 당시엔 엄청난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박서양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신식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그리고 일제 치하인 1917년에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양 의사로 활동했다. 그는 민족교육 기관인 숭신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간도 지역에 세워진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도 했다. 그는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였다.

◇‘하나님 앞에 차별 없다’는 복음의 평등사상, 조선 사회 근본부터 흔들어

1901년 김창식 목사 안수기념 사진.
1901년 김창식 목사 안수기념 사진.

박성춘과 박서양만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평등사상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조선 사회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머슴이 된 김창식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작정 가출해 머슴살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을 했다. 그렇지만 가난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 땅에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김창식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아먹는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침 올링거 선교사가 머슴을 구하고 있었고, 김창식은 그 집에 ‘위장취업’을 한다. 김창식은 날마다 예리한 눈으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만 선교사의 수상한 행동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선교사는 정중하고 예의가 바를뿐더러 천한 신분의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마저 보냈다. 그는 결국 위창취업 2년 만에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던 그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까지 받게 된다. 복음을 접한 김창식은 선교사와 함께 자신을 바꾼 그 복음을 더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평양에 간다. 그런데 1894년 여름, 평양에 느닷없는 ‘기독교인 체포령’이 내려진다. 이에 따라 김창식도 붙잡혀 투옥된다. 

김창식 목사는 '조선의 바울'로 불리며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모범을 보였다. /KBS 영상 캡처
김창식 목사는 '조선의 바울'로 불리며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모범을 보였다. /KBS 영상 캡처

그는 “배교하면 풀어주겠다”는 말을 거부한 탓에 심하게 얻어맞고 풀려난다. 이 사건은 당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조선의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줬다. 이 일로 인해 김창식은 ‘조선의 바울’이라는 별명을 엊게 됐다. 당시 평양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관찰사는 교인들을 사형수 감방에 가두고, 마치 다음 날 사형을 시킬 것처럼 겁을 주고는 교인들을 끌어내 배교를 강요했다. 그때 우리 용감한 김창식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미땅하다’고 응답했고, 그로 인해 아주 심한 매를 맞았다. 그 무렵 평양 거리는 돌투성이였는데,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돌 세례를 받으며 가까스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김창식은 목회자 수업을 받은 뒤 1901년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했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복음, 5백 년간 꿈쩍도 않던 조선 사회를 흔들어 깨우다

1938년 5월 16일 진주교회서 열린 경남노회 직후 기념 사진. 이 교회당은 6·25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1938년 5월 16일 진주교회서 열린 경남노회 직후 기념 사진. 이 교회당은 6·25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1905년 커틀 선교사가 개척한 진주교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서부 영남을 대표하는 고을 진주는 영남 동부이 안동에 뒤지지 않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고장이었는데, 신분 차별 철폐운동을 계기로 백정들이 하나 둘 진주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자 일부 교인들이 반발한다. “백정 놈들을 모조리 내보내소.” 하지만 커틀 선교사는 양반 교인들의 이 같은 요청을 거절했다. 

1909년 5월 둘째 주일, 열다섯 명의 백정 교인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교회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수백 명 교인 중 선교사를 따르던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몽땅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일반 교인들과 백정 교인들의 분쟁은 결국 49일만에 백정과 일반 교인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교회를 넘어 진주 지역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이런 선교사의 설교를 듣거나 소문을 접한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문부호가 한 자락씩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이 없으면 소고기는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이러한 움직임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한 단체인 ‘형평사(衡平社)’ 결성으로도 이어진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복음은 이 땅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처해 있던 백정들에게도 전해졌고, 복음으로 무장된 그들은 5백 년간 꿈쩍도 않던 조선 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엄청난 나팔수가 되었던 것이다. 암울했던 조선에 복음 전파를 통해 새 날의 여명은 그렇게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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