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은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다. 무시무시한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물리적으로도 버겁다. 비유컨대 산더미 같은 석탄을 삽 하나 달랑 쥐고 종일 퍼내는 막노동이다. 난곡으로 꼽히는 배경엔 음악영화 ‘샤인’의 영향도 있는데 그 유명한 대사가 이렇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연주가 되겠어?"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요즘엔 엔간한 피아노 전공자라면 그 곡에 도전한다. 반 클라이반 콩쿠르 우승자 임윤찬도 결승곡으로 그걸 골랐는데, 때문에 그것만으로 우리가 경탄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피아노를 집어삼킬 듯 두드리더라" "신들렸다"며 혀를 내두르던데, 그게 포인트다. 뭔가 자기 음악에 몰입하는 게 느껴지고, "이건 진짜다" 싶었으리라. 그게 클래식 울렁증을 씻어주는 효과인데, 절정이 3악장이다. 그토록 터져 나갈 듯 열광적이고 도취적인 곡도 드물다. 전설은 아르헤리치의 녹음(1982)인데, 임윤찬 역시 물러섬 없이 이 난곡과 승부했다. 결과는 음악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음악평론도 했던 버나드 쇼라면 "모자를 벗어 이 젊은 천재에 경의를 표하라"고 흥분했으리라.

2004년생 임윤찬에 정말 다시 본 건 나중의 인터뷰였다. "절에 살며 피아노만 쳤으면 좋겠다"는 내밀한 소원,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전주곡과 푸가’ 전곡 등에 도전하겠다는 포부인데, 그 정도면 천연기념물이다. "윤찬이는 18~19세기 사람"이라던 스승의 말이 맞다. ‘전주곡과 푸가’ 는 20세기의 바흐 ‘평균율’인데, 연주만 무려 세 시간 걸린다. 러시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니콜라예바의 옛 명레코딩에 이어 곧 임윤찬의 새 연주가 등장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 내가 파악한 임윤찬은 귀한 ‘음악의 수도승’이다.

요즘은 영화·TV나 컴퓨터에 둘러싸였고, 때문에 아무리 천재라해도 이내 범용(凡庸)해진다. 그게 바흐·모차르트·베토벤 시절과 다른데, 임윤찬은 그 잡다한 걸 물리치고 음악만으로 승부 걸겠다는 순수 소년이다. 실은 옛시대 사람들이 좀 경계했던 게 소년등과(少年登科)였다. 너무 젊어 과거시험에 덜컥 합격하면 인생 뒷감당이 힘들다는 것인데, 글쎄다. 임윤찬만은 예외다. 초기값을 월드클래스로 장식했으니 나중은 더 창대해질 것이고, 그 열매를 따는 건 모든 이의 즐거움이 아닐까? 기대된다. 험한 세상, 윤찬이 덕에 동시대를 사는 보람이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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