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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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장수 총리를 지냈던 아베 신조가 자민당 선거 유세 도중 살해당했다. 평소 일본 정치가로서 국익과 국민을 위해 자신을 완전 연소시키겠다던 그의 다짐대로 유세 중 거리에서 쓰러졌다. 그 안타까움은 일본인들 마음속 별이 되었다.

아베 사망 이후 자민당은 중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아베가 원했던 평화헌법을 자력으로 개정할 수 있는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보통국가화라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실현이 목전에 다가왔다.

정치명문가 출신 아베에게는 일본 수상을 지낸 두 명의 외조부가 있다. 한 명은 A급 전범 출신이자 일본의 우경화를 지향했던 기시 노부스케이며, 다른 한 명은 일본의 평화헌법과 비핵3원칙을 지키겠다고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다. 사토 수상은 비핵3원칙 천명으로 197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부스케와 에이사쿠는 5살 터울의 친형제였으나, 동생 에이사쿠가 외가인 사토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에 서로 성씨가 다르다.

아베 신조의 부친이었던 아베 신타로는 일본 최장수 외상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로 불려지기보다는 평화주의정치가 아베 칸의 아들로 불려지기를 더 원했다. 반면 아베 신조는 철저히 외조부였던 기시 노부스케의 우경화 정치노선을 계승했다.

아베의 정치노선은 이웃인 한국인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아베 신조야말로 베버 (Max Weber)가 강조했던 정치지도자의 3대요소인 열정·책임감·통찰력을 모두 갖춘 훌륭한 정치지도자였다. 열정과 책임감은 개인소양이지만 통찰력은 쉽게 성취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베는 고이즈미 수상 시절 관방장관 임기 동안 각 성청의 사무차관들과 매주 정책회의를 주도하면서 내치와 외치를 위한 착실한 내공을 쌓았다. 그 결과 오랜 침체 속 일본을 재활시키는 아베노믹스가 나왔고, 미국과의 관계가 강화되어 불안한 안보관계를 해소했다.

지병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았던 아베 신조의 국익과 국민을 향한 열정은 이제 일본인들의 가슴속에 묻혔다. 여의도 난장판을 매일 지켜봐야 하는 한국민들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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