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일본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남만주 철도 및 관동군 배치
1931년 봉천에서 만철파괴 조작
1932년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
1933년 ‘만주의 한인들’ 출판
1933년 일본, 국제연맹 탈퇴
이승만 독립외교의 승리

류석춘
류석춘

만주국(滿洲國)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후원해 만주에 만들어진 국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에 관동군(關東軍)을 주둔시키며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만주의 토착군벌 장작림(張作霖)은 일본의 후원을 받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蔣介石)의 북벌(北伐)에 대항했으나, 이용가치가 더 이상 없다고 여긴 일본에 의해 폭살 당하고 만다.

이로 인해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은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일본에 저항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 군부는 아예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자원과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관동군 중심으로 만주침략 계획을 수립한 일본은 1931년 9월 봉천(奉天) 외곽의 유조호(柳條湖)에서 관동군 관할인 만주철도를 스스로 파괴하고, 이를 중국의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58세 이승만. 국제연맹이 만주사변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해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동군의 전격적인 군사작전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폐위(廢位)된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푸이)를 만주국의 형식적 지도자로 내세우고, 수도를 신경(新京·長春)으로 하여 요녕(遼寧)·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열하(熱河) 4성(省) 주민 약 3천만 명을 통제하는 위성국가를 세웠다. 이 시점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韓人)의 규모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일본의 만주침략이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에 따라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 은 영국인 리튼(Lytton)을 단장으로 미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영국 대표 각 1인이 참여하는 6인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단이 1932년 10월 만주 문제에 관한 최종 보고서 ‘중국 정부의 항의’ (Appeal by the Chinese Government, 일명 Lytton Report) 를 국제연맹 이사회에 제출했다.

1933년 2월 24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본회의는 이 보고서를 기초로 일본군의 만주 철병(撤兵)과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主權)을 확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해 같은 해 3월 27일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시(戰時)체제로 전환하여 1937년 중일(中日)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켰다.

이승만은 이 국제연맹 회의를 활용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1933년 1월 5일부터 제네바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만주 평화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담은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 이라는 영문 소책자를 만들었다. 출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주재 외교특파원 서영해가 운영하는 고려출판사(Agence Korea)가 맡았다.

전체가 35쪽 분량인 이 소책자는 표지 상단에 ‘이승만 박사가 논평을 붙인 리튼 보고서 발췌’ (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Dr. Syngman Rhee) 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있다. 이승만은 이 소책자 머리말에서 출판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소책자의 목적은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 언론,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단체들이 극동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쟁점이라고 ‘리튼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는 ‘한인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함이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사무국이 이 소책자를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토록 하는 한편, 관련된 언론 인터뷰를 적극 수행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제네바를 여행 중이던 평범한 오스트리아 여성 프란체스카도 신문을 보고 이승만의 활동을 알게 되어 결국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활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영향을 미쳤으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933년 2월 국제연맹 본회의가 중국의 손을 들어 주게 만든 ‘Lytton Report’ 표지(1932). ‘중국 정부의 항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1933년 2월 국제연맹 본회의가 중국의 손을 들어 주게 만든 ‘Lytton Report’ 표지(1932). ‘중국 정부의 항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Lytton Report’ 내용을 발췌하고 이승만의 해설과 의견을 덧붙여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들에게 배포한 소책자 The Koreans in Manchuria(만주의 한인들) 표지(1933).
‘Lytton Report’ 내용을 발췌하고 이승만의 해설과 의견을 덧붙여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들에게 배포한 소책자 The Koreans in Manchuria(만주의 한인들) 표지(1933).

이승만은 이 소책자에서 한국과 만주 문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으로 시작해, 만주에 이주한 한인의 규모, 이들의 이주 사유, ‘만보산 사건’으로 대표되는 한인과 일본인 및 중국인과의 갈등, 갈등의 배경이 되는 국적 문제,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본적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또한 이 때문에 일본이 일으킨 여러 비인도적 만행과 군사적 첩보활동까지도 낱낱이 까발렸다.

이승만이 일본의 만주 지배에 관해 제기하는 문제는 『국역 이승만 일기』 (2015) 에서도 생생하게 확인된다. 1933년 1월 13일 일기는 주 제네바 미국 영사 길버트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했다. "1910년 강대국들은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을 알지 못했다. 단지 한국을 희생하면 일본이 이에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정책을 펼칠 것이라고만 믿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전 세계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한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의 첫 번째 단계이고, 만주가 다음 단계이며,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1933년 2월 4일 일기는 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 랭 박사와 대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한인들을 포함해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면서, 국제연맹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리튼보고서’가 틀렸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서류를 반박할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를 국제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는데 뉴스의 가치를 지니게 될 준 공문 자격으로 제출하기를 원한다. 사무국이 이 책자를 회원국에게 배포하게 하려면 중국보다는 다른 나라가 나서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전의 만주는 이승만이 "The Koreans in Manchuria"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일 및 러·일의 갈등과 그 틈을 이용한 한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공간이었다.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은 특히 3·1 운동 직후인 1920년 청산리 및 봉오동 전투에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일본의 집중적인 공격에 노출된 한인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급속히 위축되었다. 자유시 참변은 만주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무지한 한인 독립군이 무참히 희생된 비극적 사건이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이 1917년 성공하고 4년이 지난 1921년에도 극동에서는 여전히 제정러시아 군대인 백군(白軍)과 공산혁명군인 적군(赤軍)이 싸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 제국 백군 편을 들며 적군과 싸웠다. 일본을 상대로 싸우던 한인 독립군은 그래서 러시아 적군 편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극동에서도 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일본은 러시아 적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모색했다. 러시아의 철병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일본은 한인 독립군 해산을 요구했다.

일본과 더 이상 적대적일 필요가 없던 적군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한인 독립군을 무장해제했다. 그리고 저항하면 처형했다. 적군이 지배하는 러시아 자유시로 후퇴해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던 독립군은 국제정세에 무지해 이유도 모른 채 무장해제를 당했다. 상당수는 동지라고 믿었던 적군에 의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만주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만주가 이렇게 일본 땅으로 변해 간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며, 이승만은 일본의 침략이 만주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 국제사회에 경고하고 있었다. 제네바 외교활동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정통한 이승만 독립운동의 금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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