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1913~1975)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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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인의 정신바탕은 기독교 신앙이다. 실존주의적인 면모도 엿보이지만 그 역시 기독교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현승 시인은 한국 기독교 현대문학의 선구자였다. 종교적 관념을 신파조로 늘어놓지 않고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事物化)한다. 그의 시는 조소적(彫塑的)이고 명징하다.

시인의 고독은 신앙의 오솔길이다. 그 길로 들어서야만 신을 만날 수 있는데 ‘가을의 기도’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낙엽들이 지는’ 허락된 시간의 끝자락, 인간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오직 한 사람’은 예수님으로 보이지만, 구태여 종교적으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어떤 독자에게 ‘오직 한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다.

이 시는,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호올로 있게 하소서, 하고 문장의 뜻을 점점 더 강하게 하여 마침내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점층법이 사용되었다. 기교를 부린 게 아니라 감정이 충만해진 결과다. 마지막 연의 ‘굽이치는 바다’는 험난한 세상풍파를 겪은 청년기의 비유이며, 그리하여 다다른 곳이 ‘백합의 골짜기’이다. 기독교에서 백합꽃은 순수한 신앙의 상징이고 제대(祭臺)에 헌화된다. 시인의 기도는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가을의 기도’는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생의 가치추구이다. 시인은 추상적 관념을 산문으로 풀어내는 대신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의 모습으로 환치시킨다. 우주로 이어진 새파란 하늘, 그 아래 마른 나뭇가지 우듬지에 내려앉은 까마귀 한 마리는 절대고독에 다다른 시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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