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비밀을 가진 누군가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적대국의 정보자산이 될 수 있는 자는 사전에 제거한다. 배신자에겐 보복을, 잠재적 배신자에겐 경고를 보낸다. 스파이 세계 암살의 목적이다. 목적은 달성하되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스파이 세계 암살의 원칙이다.

1941년 2월 10일 오전 9시 30분, 워싱턴 D.C. 벨뷰 호텔에서 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오른손에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이 쥐여져 있었고, 총알 한 방이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객실은 피로 흥건했으며, 세 통의 유서가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193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 군사정보부 서부 유럽 공작조직 책임자 ‘월터 크리비츠키(42세)’였다. ‘스탈린의 비밀업무를 하면서(In Stalin‘s Secret Service)’라는 책을 출간하며, 반(反)스탈린 운동의 선봉에서 활동해오던 중이었다. 검시관은 6시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숙박부에 기재한 필체와 유서의 필체가 동일하며, 유서의 내용으로 보아 자살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크리비츠키가 암살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경쇠약과 편집증을 앓고 있었으며. 배반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했다는 증언도 보태졌다. 루즈벨트 행정부와 FBI는 크리비츠키의 죽음에 무관심했다. 루즈벨트는 공산주의를 위협으로 보지 않았고, 스탈린을 동맹국의 위대한 지도자로 간주했다. FBI는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어도 수사를 재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80년이 지난 지금도 크리비츠키의 사망 원인은 여전히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 크리비츠키의 방에서 발견된 총에는 소음기가 없었는데, 자살이 일어난 새벽 시간에 총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부인과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크리비츠키가 소련 정부를 ‘우리들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표현했다. "크리비츠키는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스탈린의 악행을 폭로하는데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비츠키는 자신이 만약 자살한 채로 발견된다면 그 정황이 어떻더라도 자신의 자살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여 자살하도록 만드는 것이 소련의 전통적 암살 수법이다." 크리비츠키의 지인들과 정보 전문가 중에는 크리비츠키가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당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1957년 10월 12일 오전 10시, 우크라이나 반체제 인사 ‘Lev Rebet(45세)’이 뮌헨에서 출근 도중 사망했다. 경찰은 돌발성 심장마비로 발표했지만, 3년 뒤 망명한 소련 비밀요원 ‘보그단 스타신스키’에 의해 암살로 밝혀졌다. 스타신스키는 자신이 Lev Rebet의 얼굴에 사이안화칼륨(청산가리)을 직접 분사했다고 자백했다. 사이안화칼륨은 흡입 즉시 동맥을 마비시켜 1분 30초 이내에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공기 중에 분사된 사이안화칼륨은 상온에서 2분, 인체에 흡입된 사이안화칼륨도 5분이면 독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살상물질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살인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지만, 자연사로 위장한 살인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 크리비츠키가 동료에게 한 말이다. 살인 전문가 스타신스키의 자백이 없었더라면 ‘Lev Rebet’의 죽음은 영원히 자연사로 남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1975년에서 1997년 사이 30명의 대학생이 자살을 했다. 학생운동에서 자살은 원래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집합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NL 계열이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자살도 내부 투쟁을 촉구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자살 대기조’ ‘분신 배후설’이 유포되었다. 암살의 미학은 자살과 자연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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