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올해 초 러시아 텔레비전 채널 ‘러시아 투데이(RT)’에서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한편이 공개됐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이 동영상은 방송으로 나가자마자 아랍과 이스라엘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동영상 공개의 배후는 누구일까? 왜 이 시점에서 이 동영상이 공개된 것일까? 한 남자가 다마스커스의 시리아 공군 본부 근처를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파이’ ‘전설의 스파이’로 불리는 ‘엘리 코헨(Eli Cohen)’ 이었다.

1965년 5월18일 새벽 3시30분 다마스커스 마르제 광장, 수천 명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리아 국방차관으로 내정되었던 ‘카멜 아민 타벳’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4년 전 아르헨티나에서 귀국한 사업가로 위장하여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했던 모사드 비밀 공작원, 엘리 코헨이었다. 국제사회의 감형 압박과 엘리 코헨의 손에 놀아났다는 모욕감, 모사드의 집요한 구명 공작에 자존심이 상한 시리아 고위층이 체포 4개월도 못 된 시점에 전격적으로 공개 처형을 지시한 것이다. 수백만 파운드 약품과 농업용 중장비 제공, 시리아 스파이 11명 석방, 교황 바오로 6세를 비롯한 서방 진영 수많은 유명인과 단체들의 탄원도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시리아는 오히려 엘리 코헨의 매장지마저 비밀에 부친 채 세 번이나 옮겨버렸다.

그러고 만 2년 뒤 1967년 6월 5일,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엘리 코헨의 진가가 확인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난공불락의 시리아 요새 ‘골란 고원’을 단 10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우리에게 애꾸눈 장군으로 잘 알려진 모세 다얀은 "코헨이 아니었다면 골란 고원을 함락시키는데 더 많은 희생을 치렀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골란 고원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라며 엘리 코헨을 추모했다.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에서 6일 전쟁의 1등 공신이었다. 수많은 거리와 공원, 건물에 엘리 코헨의 이름이 붙여졌다. 전기, 회고록, 소설, 영화가 만들어지고 우표까지 발행되었다. ‘엘리코헨 박물관’, ‘엘리코헨 추모의 길’, ‘엘리코헨 협회’ ‘엘리코헨 웹사이트’도 만들어졌다. 처형된 날을 전후하여 방송국은 추모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신문사는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엘리 코헨이 이스라엘의 전설이 되어가는 동안 스물아홉 ‘나디아 코헨’은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 56년째 남편의 유해 송환을 호소하고 있다. "큰 딸 소피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습니다. 둘째 딸 이리트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외아들 샤이는 엘리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날 때 겨우 3주 된 갓난애였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아빠(abba, 아버지라는 의미 히브리어)’라고 옹알이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첫걸음을 떼는 그 가슴 벅찬 순간에도 엘리는 집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한 일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남편이 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가 사랑했고 생명을 바쳤던 바로 이 땅에서 엘리가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나도 엘리 옆에 묻히고 싶습니다."

RT의 동영상이 공개된 이후 시리아 주둔 러시아군들이 다마스커스 한 공동묘지에서 엘리 코헨의 유해를 수색 중이라는 보도가 이어졌고,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코헨의 유해 송환 기회를 계속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인도적인 방법은 시리아가 코헨의 유해를 이스라엘로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파이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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