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이호선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다룬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하고 있는 가운데, 그가 1953년 8월 16일 미국 유력 일간지에 기고한 글의 전문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에 의해 2월 24일 조선일보에 번역·소개됐다. ‘자유투사 이승만의 절규, 나는 왜 홀로 섰는가!’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는, 독립협회 간부들이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도입 혐의로 체포·구속되자 청년 이승만이 학생운동 지도자로서 대중집회를 주도해 철야 농성 끝에 이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던 회고담이 짧게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단체라 할 수 있는 배재학당의 ‘협성회’ 회장과 서기를 했던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의 인기 연사였다. 우리 자유 헌정의 뿌리는 가깝게는 1948년의 헌법이지만,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적 합의는 이미 한일합병 전의 헌정연구회(1905), 대한자강회(1906), 대한협회(1907), 서북학회(1908) 등의 상당한 논의를 통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런 논의들의 연원은 1898년 12월 25일 고종의 금압령으로 결국 해산되고만 만민공동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협회 회원들이 주축이 된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공식 출범했다. 이후 9개월여 동안 러시아 이권 침탈과 침략간섭정책 반대(3월 2일), 서재필 재류 요청(4월 30일), 무관학교 선발 부정 비판(6월 20일), 일본인 피살자 배상금 요구 및 경부철도부설권 침탈 반대(7월 16일) 등 구한말의 정치·사회적 현상에 대한 개화지식인들의 문제 인식을 정부에 전달하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주적 시민의식과 역량이 체계적으로 결집됐다는 측면을 감안하면 그냥 잊을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한 개인을 넘어 선대의 시민사회 역량 구축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오는 3월 10일은 만민공동회 출범일,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이다. 유력한 기념관 후보지로 거론되는 송현공원에서 자유시민우파의 축제를 벌여보면 어떨까. 만민공동회에서 청년 이승만이 나와서 연설하는 행사도 괜찮지 않을까. 애완견 벨라를 데리고 광장을 산책할 때마다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우남 이승만 성대 모사 대회같은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청년·대학생들에게 상금도 좀 넉넉하게 주고. 잘만 기획하면 해마다 신나는 자유시민의 축제, 대한민국과 서울의 축제 하나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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