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일보 지령 100호에 부쳐

민중주의적 해석 틀리지 않지만, 다층적 해석 얼마든지 가능
모든 생명은 결국 마지막에 눕는다...'풀'은 생명의 '자연현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1921~1968)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몇 해 전 문학평론가와 시인 100명에게 한국 현대시사에 길이 남을 시 한 편 꼽으라 했더니 김수영의 ‘풀’을 뽑았다. ‘풀’은 시인의 마지막 유작이다. 지금까지 ‘풀’의 해석은 정형적이다. 이를테면 풀은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는 부당한 권력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는 권력에 탄압받는 민중의 시련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표현은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풀’에 대한 민중주의적 해석은 상식이 되었다. 실로 이상하고 괴이한 일이다. ‘풀’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의 정형적 해석은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의 도그마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간단히 정리될 문제는 아니지만 한마디로 민중주의 유행에 편승한 전교조 국어교사들과 연구자들의 합작품이다.

‘풀’의 참신한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풀을 민중으로, 바람을 권력의 억압으로 보는 게 아주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층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마리는 마지막 행에 있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표현은 종당에 풀뿌리가 눕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연의 이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에는 풀도 있고 인간도 있다. 풀 자체를 노래한 것일 수도 있고, 풀을 사람에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울고 웃다가 마지막에 눕는다. 다시 말해 죽는다는 것인데,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쓰러짐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위한 스러짐이다. 새로 피어나기 위해 풀뿌리는 누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노인은 눕고, 아기는 일어난다. 이제 김수영의 ‘풀’은 생명의 자연현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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