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5·16이 발생한 지 어언 61주년이 되었다. 보수우익의 열화같은 지지를 받고 간신히 정권 교체에 성공한 윤석열 정권은, 5·16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특별열차를 동원해 광주 5·18행사에 나섰다.

이를 본 보수우익의 실망감은 컸을 것이다. 하기야 박근혜 정권이 등장했을 때, 국회청문회 장관급 인사들의 질의에서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라는 가시돋힌 야당의원의 질문에 제대로 명쾌하게 답한 고위공직자 후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체제를 수호해야 할 고위공직자들의 현대사 인식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산업화-민주화 업적을 불과 70여 년 만에 달성했다.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다. 그 기반이 된 것이 다름아닌 박정희 시대 18년이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6·25의 절체절명 순간에 미군을 끌어들여 북괴군과 중공군을 몰아냈다. 하지만, 외교 천재인 이승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건국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87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6·25 종식 후 장면 정권이 등장할 때까지도 1인당 국민소득은 90달러가 되지 못했다. 5·16이 터지고 장면 내각의 책상서랍에서 뭉치로 발견된 것이 경제개발 기획안이었다. 기획은 무성했지만 실행력을 상실한 채, 경제개발 계획은 정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쿠데타라는 용어는 군사정변이란 뜻으로, 프랑스어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사전적 정의는 ‘무장한 군인들이 기존의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불법적으로 집권하지만, 단순한 권력자의 인적 교체에 그치고 정치권력의 계급적 교체나 사회경제적 큰 변화를 추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쿠데타가 단순히 권력자의 인적 교체에 머문 데 반해, 혁명은 정치세력의 계급적 교체가 수반되고 나아가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5·16이 발생했을 때, 소위 혁명주체세력들은 아래 6가지 혁명공약을 제시하였다.

"첫째,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의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준비를 갖춘다 …"

이 가운데 6번째 항목을 제외한 5가지 항목의 약속은 지켜졌다. 80% 이상 공약을 이행한 것이다. 군부 엘리트가 정계에 진입, 정치세력의 광범한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산업화(근대화)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동하였다. 특히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업적은, 2천 년 한국사에서 어떤 영명한 군주도 해결하지 못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한 점이다.

제3공화국부터 1979년 저격사건(10.26사태)까지 18년 장기집권으로 인해 독재자라는 비난을 각오하면서까지, 박 대통령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했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력을 강화했다. 그래서 오늘날 선진 자유진영에 동참할 수 있는 현대국가를 이룩했다. 이미 작고한 고 김일영 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저서 <건국과 부국>에서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인해 중산층의 두터움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5·16은 1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과정을 통해 쿠데타에서 혁명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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