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폭풍우가 몰아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겨울 밤, 모사드 공작원 한 명이 요르단 강을 건너고 있다. 공작관은 강둑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공작의 성공을 기도하고 있고, 공작원은 급류를 헤치며 나아가는 중에도 권총을 꺼내 누군가를 저격하는 제스처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요르단 국경 도시 카라메(Karameh) 경찰서로 물에 흠뻑 젖은 한 사내가 찾아 왔다. 사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자신에게 ‘파타(Fatha,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지도자 ‘아라파트(Yasser Arafat)’를 암살하도록 최면을 걸었다며 지난 7개월 동안 모사드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사흘 뒤 ‘파타’에 인계된 사내는 아라파트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연설까지 했다. 사내는 폭풍우 속 요르단 강가에서 공작관과 비장한 작별인사를 나누던 바로 그 공작원이었다.

1968년 5월, 이스라엘 해군 소속 심리학자 ‘샤리트(Binyamin Shalit)’가 ‘맨츄리안 캔디데이트(Manchurian Candidate)’라는 미국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1962년 개봉 당시엔 시선을 끌지 못한 영화였는데, 이듬해 캐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영화였다. 중국 정보기관이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포로를 최면으로 세뇌시켜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한다는 내용이었다. 샤리트는 자신도 이 영화처럼 포로를 세뇌시켜 암살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샤리트는 신벳‧아만 등 정보기관 관련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어렵사리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샤리트는 수감 중인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포로 중 특별히 영리하진 않지만 남의 말을 잘 듣고 아라파트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호의적인 포로를 대상자로 선택했다. 베들레헴 출신의 28살 건장한 사내였다. ‘파티(Fatkhi)’라는 코드명도 부여했다.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좋다(Fatha good),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좋다(PLO good), 아라파트 나쁘다(Arafat bad), 아라파트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He must be removed).’ 첫 단계로 ‘파티’의 뇌리에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와 아라파트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를 심었다. 두 달쯤 지나자 ‘파티’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단계로 아라파트의 사진을 구석구석에 붙여놓고 샤리트의 명령이 떨어지면 거의 반사적으로 아라파트의 미간(眉間)에 총을 쏘는 훈련을 시켰다. 몇 달이 지나자 ‘파티’는 샤리트의 지시에 일고의 여지없이 기계처럼 따르게 되었다. 샤리트는 ‘파티’의 최면상태가 최적이라고 판단했다. 1968년 12월 19일, 샤리트는 ‘파티’에게 요르단 강을 건너 아라파트를 암살하라고 지시했다. ‘파티’는 한 치 망설임 없이 폭풍우 몰아치는 요르단 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가 찾아 간 곳은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의 아라파트가 아닌 요르단 경찰이었다.

의지에 반한 최면상태 유도는 불가능하다. 최면상태라도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행동은 유도하기 어렵다. 최면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탐사 저널리스트 ‘로넨 버그만’은 표적 암살의 비밀역사를 다룬 ‘일어나 먼저 죽여라(Rise and Kill First)’에서 ‘최면을 이용한 모사드의 아라파트 암살 공작’을 수준 이하의 우스꽝스런 공작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돈‧권력‧시간 등 자원이 충분하고 시나리오가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 진다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최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실패한 공작은 드러나지만 성공한 공작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 공작의 세계다. 영화보다 더 영화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가 현실 속 스파이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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