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접시


눈도 코도 없는
살빛만이 부드러운 접시 한 장이
허허로이 비어 있다.

등불의 부신 과일이
깊은 성숙을 뿜어 올리던
지난 가을에
접시는 다만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안타까운 손을 벌리고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은
이렇게 조용한 것인가.

지금, 비인 육신을 뉘이고
눈도 코도 없는
살빛만이 부드러운
접시 한 장이
스스로의 빛을
뿜어 올리고 있다.

박남수(1918~1994)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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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시인은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거기에 관념의 옷을 입힌다. 그런 다음 이미지로 함축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그의 시어는 한마디로 사물과 연계된 자아탐구라 할 수 있다. 실존과 상징을 재료로 그릇을 빚듯 언어를 빚어낸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다. 한국시단에 이처럼 언어미학을 추구하는 동시에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시인은 보기 드물다.

‘백자 접시’는 생명 없는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떠올려도 좋다. ‘눈도 코도 없는 살빛만이 부드러운 접시 한 장’이 진열장 속에서 누구 하나 봐주는 이 없이 ‘허허로이’ 자리만 자지하고 있다. 백자 접시는 오래된 골동품일 수도 있고 근래에 도공(陶工)이 빚은 그릇일 수도 있다. 잘 익은 과일이 ‘깊은 성숙을 뿜어 올리던 지난 가을에 접시는 다만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백자 접시가 ‘스스로의 빛을 뿜어 올리고 있다.’ 접시가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손을 벌리고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접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시인의 인식에 대전환이 일어났다. 직관(直觀)의 눈을 떴고, 그러자 비로소 접시의 존재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자 접시 한 장은 이제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박남수 시인은 이처럼 상징의 언어로 시를 조탁한다. 언어적 상상력을 촉발시켜 이미지를 해방시키고 한 차원 높은 성찰의 미학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그의 시는 울림이 깊고 감상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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