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근
박석근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느덧 처서가 코앞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는 입이 비뚤어진다고 한다. 귀뚜라미 등에 업혀 처서가 온다는 말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물 무렵이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귀뚜라미소리가 들려온다.

독서의 계절, 책을 잡지만 나라 안팎이 전례 없이 어지러워 마음이 뒤숭숭하다. 어쨌거나 독서는 사람을 성장시킨다. 한 권을 읽은 사람의 정신세계는 두 권을 읽은 사람을 능가할 수 없고, 두 권을 읽은 사람은 세 권을 읽은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독서를 안 하는 것은 성장의 멈춤이다. 멈춤은 현상유지로 보이지만 사실상 퇴보다.

얼마 전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SNS에 근황사진과 함께 책 한 권을 추천했다. 김훈의 신작 ‘하얼빈’. 그는 "광복절 연휴에 읽으면 좋을 소설입니다"라고 썼다. 독서인이라는 것을 지지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였을까? 그러고 보니 책 추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동기 변호사가 쓴 ‘지정학의 힘’, 그리고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지정학의 힘’은 보수 진영의 대북강경책을 비판하고, 과거 문재인 정부의 친중 친북 반일 정책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지정학의 힘’은 ‘지리의 힘’ 축소판으로 한국정세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현 정부 인사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정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민족에게 지정학적 위치는 숙명이며, 지정학적 상상력과 전략적 사고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좀 길게 소감을 피력했다.

은퇴해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과 달리 문재인은 SNS정치를 하고 있다. ‘하얼빈’은 8·15광복절을 맞이해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지정학의 힘’은 2019년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과 공무원 월북조작 사건 수사에 대한 우회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지정학의 힘’은 한반도 주변 패권국가들의 전략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조국분단이 일본의 지정학적 전략에 의해 획책되었고, 우리가 살 길은 이제부터라도 이념적 반목을 버리고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북한과 힘을 합치는 길밖에 없으며, 따라서 탈이념 시대에 남북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라면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지리의 힘’과 ‘지정학의 힘’은 지리와 지정학이 개인과 세계사 그리고 경제를 좌우한다는 것이며,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경유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한반도를 무늬만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게 있다면 남북분단이 일본에 의해 획책되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얼빈’과 ‘지리의 힘’, 그리고 ‘지정학의 힘’을 추천했던 이유가. 그러니까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공무원 월북조작 사건 등은 남북화해와 평화구축을 위한 통치행위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초법적 행위가 아니고 더구나 헌법을 벗어날 수 없다. 율사 출신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과거 일련의 행위들이 실정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체(國體)인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를 삭제하고 이승만을 그토록 부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경계하라!" 마치 문재인 전 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아집과 오만, 편견의 늪에 빠지게 된다.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고 확증편향의 틀에 갇힌다. 이것은 여야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명언이다. 한 권의 책에 마음이 꽂혀 친북 친중 반일정책을 펼쳤던 전 대통령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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