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화물연대의 파업이 시작됐다. 사태의 전개에 따라 총파업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제 노조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산업역군이 아니라 이 나라의 숨통을 끊는 흉기가 되고 있다. 노조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지점에서 검토할 시점이 됐다.

노동조합은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공장 조립라인 등장, 거기서 일하는 비숙련 노동자 집단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 19세기 후반 최소한 20세기 들어서는 대부분의 근대 국가에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

노조의 필요성이 인정됐던 것은 자본주의 초기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의 방직공장에서 기저귀를 찬 아이가 일했다는 목격담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나치게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노동자 계급의 평균 수명이 너무 낮아진 것도, 노조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요인이 됐다.

1830년대 말 농촌에 살았던 영국 지주계급의 평균 수명은 50~52세였지만, 맨체스터·리버풀 등 공업도시에 살았던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15~19세 정도였다. 임금이 낮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고용하는 공장도 많았고, 결국 노동자 계급이 소멸될 위험에 처했다. 노동자의 아들과 손자가 태어나지 않을 경우 자본주의 체제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등장은 시대적 요구였다. 하지만 21세기 현실에서 노조는 이제 시효가 다한 법적 기구라고 봐야 한다.

노조는 우선 불평등계약에 근거하고 있다. 노동자-경영자 고용계약에서 노동자는 얼마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하지만 경영자는 그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다. 법적으로 해고를 하려면 커다란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 공정한 계약의 정신을 부정하는 조직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비해 약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해 줘야 한다는 전제도 따져봐야 한다. 산업혁명 당시와 달리 지금은 노동자들이 약자라고 보기 어렵다.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노동법이 아니라 일반 형법과 민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제받을 수 있다. 굳이 노동법까지 동원해서 보호해야 할 법적 정당성이나 이익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이 권리가 확대되고, 복리가 개선됐다. 이것은 노조의 역할보다 자본의 축적과 확대재생산으로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에 따른 노동자들의 직업 선택 기회가 확대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자유시장 계약이 아닌, 노조가 단체행동 등으로 쟁취한 임금은 자유시장 임금보다 높은 초과임금이다. 자본가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초과임금만큼 비조직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뺏어가게 된다. 자동화나 해고, 인력 절감 등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해고는 살인’이라며 고용의 경직성을 주장하고 유연성을 반대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기술과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여기에 대응하려면 고용의 유연성이 필수적이다.

대규모 조립라인에서 노동자들이 비슷한 노동을 하는 환경은 점차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다. 앞으로 노동자들은 전문성을 갖고 자신의 노동에 대해 책임지는, 개인 브랜드화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종의 경영 주체로서 또 다른 경영 주체인 기업 경영진과 1대1 계약을 맺게 될 것이다. 고용계약도 그런 변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일자리가 기본적으로 비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미래에는 정규직 계약이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 노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미래의 모색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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