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
황근

말 그대로 ‘여론조사 전성시대’다.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들의 공천 작업이 속도를 내면서, 정당이나 예비후보 지지도 조사가 마치 홍수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여·야가 여론조사 결과를 공천 기준으로 활용하면서 여론조사가 넘쳐나고 있다. 여론조사가 후보 추천을 위한 ‘전가의 보도’가 되어버렸다. 모든 정당들이 연일 보도되는 지지율 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고, 오차범위를 무시한 결정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여론조사에 대한 의혹과 갈등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여론조사 오용·남용·악용이 뒤범벅된 느낌이다.

한국 정치에서 여론조사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선거 관련 여론조사는 각 정당이 전략적 차원에서 행해졌다. 지금처럼 여론조사기관들이 정기적이고 공개적으로 실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직접면접을 통한 설문조사가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전화면접이나 ARS 조사는 응답률이 너무 낮고 신뢰도가 떨어져 주로 내부 참고용으로만 이용되었다.

정치 여론조사가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된 계기는 1996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처음 허용된 출구조사다. 그러나 지상파방송 3사가 공동 실시한 조사는 실제 결과와 크게 달라 비난을 받았다. 투표장과 면접 장소와의 거리, 대면 응답 등이 원인으로 지적됐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거구별 표본의 크기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다. 언론매체들도 여론조사 결과를 뉴스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결과는 수치를 통해 수용자들의 관심을 끌어 상업주의 언론들의 가성비 좋은 소재가 된 것이다. 선거 역시 경마 중계처럼 보도하는 ‘경마식 보도’(horse-racing report)가 만연된다.

이렇게 급성장한 여론조사가 오용된 사건은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가 여론조사 결과로 결정된 것이다. 후보 등록 직전 2개 여론조사 결과를 오차범위와 무시하고 단순 합산해서 단일화했기 때문이다. 오차범위 이내란 표본과 모집단이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표집 오류 때문에 측정값이 의미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를 감안하지 않고 조사 결과를 적용한 것은 전형적인 여론조사 오용이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여론조사는 또 한 번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때부터 주로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나 비정기적으로 실시됐던 여론조사가 일상화된다. 정치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여론조사가 진행되고, 비선거기간에도 대통령이나 정당 지지도, 주요 정치 쟁점들에 대한 조사가 정기적으로 발표·보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비용도 적게 들고 신속하게 실행할 수 있는 온라인 조사가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이처럼 여론조사가 급성장하면서 급기야 정치적으로 활용된다.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후보 선출에 당원투표와 일반 여론조사를 합산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가 당원투표에서 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이겨 결국 대통령까지 당선됐다.

당시에도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데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여론조사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후진적 정당 문화를 극복하고 국민 여론을 반영한다는 논리로 여론조사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그 이후에는 대통령 후보뿐 아니라 국회의원 후보 추천에서도 여론조사 결과가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여론조사의 남용은 결국 오용으로 진화된다. 후보 공천을 위한 여론조사에서 특정 후보를 배제하기 위해 공신력에 의문이 있는 조사기관을 선정하거나 조사 방법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사과정이나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그런 의혹이 더욱 커지고 있다. 만약 그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여론조사의 악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총선에서 여론조사는 남용·오용·악용이 모두 총집합한 종합선물세트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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