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정의 길 따라...] 군산 근대역사 여행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서울에서 고작 3시간을 갔는데, 시간은 무려 90년을 거슬러 올라왔다. 전북 군산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건축물들이 서 있는 근대 문화유산 거리를 걷다 보면 왜 군산을 ‘근현대사 야외 박물관’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간다. 박물관이며 미술관, 도시 곳곳에 자리한 빈티지 스타일의 카페는 여느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특히 군산은 가족과 함께 도보여행을 즐기기에도 어려움이 없는 곳으로 따뜻한 봄햇살을 맞으며 도보 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과거의 모습으로 서 있는 현재

군산은 1899년 개항과 함께 근현대사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일제는 군산항을 호남지역에서 수탈한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 해망로 일대의 예전 지명은 장미동이었다. 장미동의 ‘장미’는 꽃 이름이 아니라 ‘쌀을 저장(장미藏米)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때 어수선했던 이 일대는 2011년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름 그대로 군산의 근대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해양물류역사관, 어린이체험관, 근대 생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특히 ‘1930년대 시간여행’을 주제로 1930년대 군산에 실제로 있었던 건물을 복원해 전시해 놓은 근대생활관이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군산역, 영명학교, 야마구치 소주 도매장, 형제 고무신방, 잡화점 등 당시 군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제일은행 군산출장소 출근부, 창씨개명 호적 원부, 토지 목록, 지적도 원본 등의 귀한 자료들도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1층에 자리한 등대도 눈길을 끈다. 어청도 등대 모형으로, 어청도 등대는 1912년 3월1일에 점등한 이후 오늘까지 고군산열도 앞바다를 지나는 선박들을 길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

군산항.
군산항.

근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건물들도 새 단장을 했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근대 건축관’으로 바뀌었다. 1922년 건립된 이 건물은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금융기관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은행, 한일은행의 군산지점으로 변했다가 한때 유흥주점 간판이 달린 적도 있다.

일본인 무역회사였던 ‘미즈상사’는 ‘미즈커피’로 바뀌었다. 당시 미즈상사는 일본 등에서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해 판매하던 회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현재 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있었는데 조성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카페로 재단장했다.

‘일본18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근대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일본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대부업을 운영하며 인천과 군산 등에 지점을 차리며 성업했다고 한다. 일제의 조선 곡물 수탈을 상징하는 ‘장미동 곡물창고’도 지금은 ‘장미갤러리’로 바뀌어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옛 군산세관 건물.
옛 군산세관 건물.

군산 근대역사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구 군산세관 건물이다. 적벽돌로 지은 건물에 동판으로 얹은 지붕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1908년 대한제국이 벨기에로부터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에 있는 서울 역사건물,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해망로와 맞닿은 군산 내항에는 당시 3천 톤 급 기선을 댈 수 있었던 부잔교(뜬다리)가 아직도 남아있다. 부잔교는 밀물 때는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고 썰물 때면 수면 만큼 내려가는 다리로, 쉽게 말하자면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 접안 시설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근대의 흔적은 빵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앙로 1가에 자리한 이성당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이즈모야’라는 화과점에서 출발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국인 이 모 씨가 가게를 인수하면서 이성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이성당은 ‘이(李)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빵집(堂)’이라는 뜻이다. 최고 인기메뉴는 단팥빵과 야채빵이다.

이성당.
이성당.

이성당에서 십여 분 걸어가면 히로쓰 가옥이다. 군산에서 큰 포목점을 하며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 지은 목조건물이다. 다다미방과 편복도, 일본 붙박이장인 오시이레와 손님을 맞는 도코노마 등 대규모 일식 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마룻바닥을 걷다 보면 유난히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는 지점이 있다. 이곳이 바로 히로쓰의 방문 앞이다. 이는 무사 가옥의 특징인데, 삐걱거리는 소리는 자객의 침입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의 집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 「타짜」에서 극중 백윤식이 조승우에게 ‘기술’을 가르치던 집도 바로 이곳이다. 히로쓰 가옥을 지나면 동국사에 닿는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 다. 정면 5칸, 측면 5칸, 가파른 단층식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독특한 느낌의 레트로 군산

히로쓰 가옥을 지나면 동국사에 닿는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 가파른 단층식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동국사.
동국사.

군산은 이런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됐다. 대표작이 한국 멜로 영화의 역사에 남을 「8월의 크리스마스」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한 영화의 대부분을 군산에서 촬영했는데, 월명공원으로 가는 언덕 길목에 영화를 촬영한 초원 사진관이 영화에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음식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초원 사진관보다는 맞은 편에 서 있는 한일옥이 더 반갑다. 40년 동안 쇠고기뭇국 하나로 전국구 맛집으로 등극한 곳이다. 이 집 쇠고기뭇국은 특별한 육수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진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비결은 한우 안심과 양지 등 3종류의 쇠고기 부위를 물에 넣고 1시간 이상 푹 끓여 내는 것. 무는 보통 깍둑썰기로 두툼하게 썰어 넣고 끓이지만 햇무가 날 때는 무가 질겨지기 때문에 다소 얇게 써는 것이 노하우라면 노하우다.

주문을 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에 뭇국이 금방 담겨 나온다.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 입 떠먹으면 온몸이 따뜻해진다. 부드러운 무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고 고기의 감칠맛도 아주 좋다. 여기에 밥을 말면 최고급 국밥 한 그릇이 된다. 잘 익은 깍두기도 맛을 더한다.

군산에서 또 맛봐야 할 음식은 아구찜이다. 마산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아귀 요리로 쌍벽을 이루는 도시다. 마산이 말린 아귀를 쓰는 것과 달리 군산은 생아귀를 쓴다. 생아귀는 물컹하고 약간 푸석하다. 비린내도 약간 있어 갖은양념으로 이를 죽인다. 군산식 아귀찜은 된장국물에 생물 아귀를 자작자작 졸인 다음 야채를 얹어내는 방식. 된장이 비린내를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귀의 쫄깃한 맛을 살리기 위해 콩나물도 대가리는 따내고 줄기만 넣는다. 간이 자극적이지 않고 양념도 그리 진하지 않지만 아귀의 선도가 워낙 좋아 훌륭한 맛을 낸다.

경암동 철길마을도 빼놓을 수 없는 곳. 오직 군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을 지닌 곳이다. 낡은 판자집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철길이 놓여있다. 이곳에 처음 철길이 놓인 때는 1944년 4월 4일. 군산시 조촌동에 소재한 신문용지 제조업체 ‘페이퍼코리아’사의 생산품과 원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차가 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다. 2008년 7월 1일부터 통행이 멈췄다.

◆군산 맛집

아귀수육.
아귀수육.

똘이네집(064-443-1784)은 군산 사람들이 손꼽는 졸복 매운탕집이다. 13년째 같은 자리에서 문을 열고 있다. 군산 앞바다에서 잡은 자잘한 졸복과 아욱, 콩나물, 미나리를 넣고 국을 끓이는데, 특히 아욱이 구수한 맛과 감칠맛을 더한다. 똘이네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유락식당(063-445-6730)과 중앙식당(063-446-0471) 등 반지 회와 무침을 내는 집이 있다. ‘반지’는 군산 사람들이 밴댕이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중동에 자리한 중동호떡(063-445-0849)은 1945년부터 문을 열고 있는 호떡집이다. 기름에 튀긴 것이 아니라 밀대로 밀어 기름기 없이 구워 낸다. 그만큼 담백하다. 한일옥(063-446-5491)도 미리 전화를 해보고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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