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토(焦土)의 시 8/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져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들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삼십 리면 가로 막히고

무인공산의 적막만이
천만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데서 울려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구상(1919~2004)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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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의 시’는 15편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구상은 시로 한국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시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절망과 탄식 속에 피어나는 인간존엄성 회복이다. 초토란 불에 타서 새까맣게 그을린 땅이다. 그렇듯 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전쟁 중 시인은 우연히 적군 묘지를 목격한다. 그런데 그 묘지는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만든 묘지다. 시인은 거기서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임을 목도하며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본다.

어쨌거나 전쟁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간다. 그곳이 어디든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굳이 사해동포주의 정신을 꺼내들지 않더라도 무고한 희생을 방관해선 안 된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자유에는 피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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