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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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전 총리 피살이 의미하는 것은 우선 ‘중국·북한의 가장 치밀한 적은 일본’이라는 유산의 소멸이다. 그를 친미, 미일동맹 옹호자로 기억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기 나라를 사랑한 지도자였다. 중국은 6·25 당시 패망 직전의 북한을 구했고 여전히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와 그의 후임자들은, 미국이 일본·한국 방어에 피로를 느끼고 북핵문제를 ‘자비’의 영역에 맡길 수 있다는 우려를 해왔다. 2006~2007년과 2012~2020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은 사람이 바로 아베 당시 총리였다.

아베 전 총리가 1947년 미 군정 기간 중 수립된 일본헌법 제9조(군사행동 포기) 폐지를 위해 애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북한이 일본 상공에 미사일을 쏘며 실험을 할 때 아베 전 총리가 가장 바란 것은 일본이 헌법 9조의 제약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한 국제평화를 성실히 바라고 추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9조 1항은 아베 전 총리에게 큰 짐이었다. 동맹국 미국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제약을 가지고 적들을 대항할 수 있을까.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부를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게 아베 전 총리의 당초 목표였다. 그러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헌법 9조 수정 시도는 자민당 내 좌파들 뿐만 아니라 온건파들에게도 반대를 불렀다. 자기들 헌법이 정복자에 의해 쓰여진 사실은 유쾌하지 않겠지만, 현상유지 경향이 강한 국민성은 현행 헌법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헌법 9조 수정으로 전쟁에 휘말릴 여지가 높아진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아베 비판가들은 그의 외조부가 A급 전범으로 지명됐던 기시 노부스케임을 잊지 않았다. 만주국에 행한 폭정 때문에 1945년 일본 패망 후 투옥됐으나, 1955년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창당을 돕기 위해 석방됐다. 1950년대 후반 총리로서, 기시는 경제재건에 집중했다. 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1964~1972년 총리, 아들 아베 신타로는 1982~1986년 외무상을 지냈다.

보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고 자란 아베 전 총리에게 자위대 명칭 변화는 필생의 임무였다. 그러나 헌법 9조가 걸림돌이었다. 9조의 두 번째 문단에 "육·해·공군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명시돼 있다. 아베 전 총리에겐 헌법 9조의 족쇄에서 일본을 해방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해외로 파병할 자유가 필요했다. 중국의 대만 공격 상황을 상상해보라.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재건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 또 만약 북한이 실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중국·러시아 지원을 받을 북한을 현행 헌법 하의 일본이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일본 오키나와의 공·해군기지와 도쿄 남쪽의 요코스카 해군기지, 주한미군 2만8500명과 주일미군 5만 명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중 ‘미군 철수’를 언급한 바 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인 한국인들에게는 일제 식민지 역사의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세력도 있다. 미국 주도의 3국동맹에 한국·일본이 서로를 용인할지도 의문이다.

"일본이 해외에 군대를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던 아베의 주장은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나왔으리라 본다. 그는 혹시 미국이 동북아에서 전력을 줄일 때 그 공백을 메워야 할 존재가 일본임을 알았던 것이다. 헌법 9조 개정의 추동력이 떨어진 가운데, 중국의 무력 증강과 미국의 방어력 약화 조짐도 보인다. 이 문제는 또 다시 중대한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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